제목: 새치 하나, 주름 둘

원고 2010. 1. 22. 02:29 Posted by 오미크론2

  같은 또래 돌잔치에 갔을 때의 일이다. 마주앉아 식사하던 선배가 문득 내 머리를 보더니 웬 새치가 그리 많아졌냐며 새삼스레 놀라했다. 교회에서 오가며 20년 가까이를 알고 지내서 그런지 상대방의 모습에서 시간의 흔적을 쉽게 못 잡아내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우리가 벌써 …" 그 뒤로 세월 헤아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내 눈엔 암만 봐도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 얼굴인데도, 요즘 눈가에 주름이 장난 아니라며 엄살을 부리는 그 선배에게 옆자리 동기가 씨익 웃으며 한 마디 던진다. "받아들이셔야죠, 누나!"

  따지고 보면 그렇다. 아니라고 못할 걸 뻔히 알지만 순순히 받아들이기엔 어딘가 좀 억울한 것들이 종종 있다. 회사 일에 쫓겨 연달아 며칠 철야라도 했다 치면 영 맥을 못 추는 저질 체력이 그렇고, 앉은 자리에서만 일하는 사무직이라서 별수 없다는 변명으로 감추기엔 너무 넉넉해진 뱃살이 그렇다. 애들 낳아 키우랴 가족들 돌보랴 정작 자신에겐 소홀한 통에 한창 때의 미모는 앨범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된 아줌마의 모습은 또 어떤가. 빡빡한 일상에 나도 모르게 까칠해진 성질머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 뿐이랴. 뜯어진 달력 너머로 지나가버린 세월의 흐름은, 받아들이기 전에 놀라움이 앞선다. "어느새 벌써 이렇게 …"
  다음 주로 파송을 앞둔 선배들을 떠올리며 내 나이를 계산해본다. 요셉에서의 남은 시간이 촉박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여유만만 할 정도도 아니다. 며칠 전 퇴근길에 우연히 만났던 남선교회 2년차 정 아무개 선배의 말처럼 어어 하는 새에 훅 지나갈 지도 모를 일이다.

  삼십 몇 년 동안 해놓은 게 과연 무엇인가, 약간 오바스런(?) 고민에 잠긴다. 약해질 때 기댈 만한 신앙의 족적을 남겼는가, 선물로 받은 자식들이 귀감 삼을 공력을 쌓았는가. 아니, 좀 더 직설적으로 셈해보자. 여태껏 살아오면서 몇 명이나 말씀 앞으로 전도했던가. 성경은 얼마나, 구속사 시리즈는 몇 번이나 읽어봤는가. 얼마나 자주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했던가. 성전 청소든 초소든 행사준비든 헌신봉사에 힘을 보탰는가. 직분자로 부르신 손을 맞잡았던 것에 쪽팔리지 않을 만큼 사력을 다해 충성했던가. 영적으로 자신이 없다면 혹 바깥세상에서 보란 듯이 출세라도 했던가. 블레셋 속의 이삭처럼(창26:12), 애굽 속의 요셉처럼(창41:41) 말이다. 다소 과장된 바도 없지 않지만 그것으로 위로 받기엔 삼십 몇 년의 무게가 녹록치 않다.

  어느 블로그에서 읽었던 글귀로 기억한다. 나이는 '먹기'도 하고 '들기'도 한다고. 나이를 먹을 때는 그 주체가 자기 자신이지만 나이가 들 때는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제 순리대로 드는 것이라고. 나이를 먹는 것을 성장이라 한다면, 나이가 드는 것은 늙어가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이 먹고 싶어 하면 아이이고, 나이 드는 것이 싫어지면 어른이라고. 신입으로 입사한 새까만 후배 직원의 나이를 물어 보며 "참 좋-을 때다!" 하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확실한 어른인 것 같다.
 
  지난날을 추억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모습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지난날을 지난날로 인정해야 한다. 보람찬 삶이었든 아쉬움이 묻어나는 삶이었든 다시 돌이갈 수 없는 과거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몇 년 전의 자기 모습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시쳇말로) 나잇값 하나 제대로 못한다면 그건 미련이고 집착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 나이에 걸맞은 모습과 행동, 수준을 찾아나간다면 미래의 내가 자랑스러워할 '생애 가장 찬란한 시기'는 바로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매해 다짐했었건만 올해의 첫 달도 달랑 한 주 남기고 유야무야 날아가 버렸다.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눈을 부릅뜨자. 머리에 새치 하나, 눈가에 주름 둘, 세월의 자취를 받아들이고 그 흔적에 민망하지 않은 신령한 내공을 길러보자. 그것이 우리에게 시간을 선물하신 분에게 부끄럽지 않은 길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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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6.7] 소통(疏通)을 위한 기도

원고 2009. 9. 14. 19:57 Posted by 오미크론2
(평강제일교회 요셉선교회 주보 제582호 2009. 6. 7)

  대략 두 돌을 전후하여 아기들은 가장 원초적인 의사소통 수준의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한다. 물론 아직은 발음도 불완전하고 억양도 신통찮다. 제대로 못 알아먹는 내용도 태반이다. 부모조차도 알아듣지 못하는 통에 아기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다 제 풀에 지쳐 짜증을 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중에 가서야“아, 그거 말하는 거였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발음과 억양이 어지간히 자리를 잡은 후에도, 아이들과의 대화는 여전히 만만치가 않다. 어른 세대와 비교할 때, 주요 관심사가 다르고 판단의 기준과 문제 해결의 접근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의도를 옳게 헤아리는 소통(疏通)은 비단 아이와 어른 간의 문제만이 아니다. 다 큰 성인들 사이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고민거리다. 처한 형편이 다르고 우선적으로 챙겨야 할 이해관계가 다르면 상대방의 ‘아’는 내게 ‘어’로 들리고 나의 ‘오’는 상대방에게 ‘우’로 전달되기 쉽다. 하물며, 한 쪽은 말할 수 없는 상실감으로 감정적인 패닉에 빠져 있고, 다른 한 쪽은 지레 내린 판단에 따라 아예 귀를 틀어막고 있는 상황이라면 소통은 사실상 물 건너간 셈이다. 

  약 보름 전 토요일 아침, 대한민국 헌정 사상 초유의 사건이 터졌다. 전국 각지에 설치된 분향소를 다녀간 인원만 기백(幾百)만 명에 이르고 노제가 치러진 서울 광장은 노란 물결로 가득 찼다. 일주일의 장의 기간 동안 인터넷과 매스컴은 온통 이 사건에 대한 얘기로 넘쳐났으며, 일부 해외 언론에서도 제법 비중 있게 이를 다뤘다.


  솔직히, 이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다. 재임 당시의 국정 사안 상당수가 즉각적인 호불호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 그로 인해 국민들로부터 극과 극의 찬반을 불러 일으켰다. 임기 말에는 10%대의 참혹한 지지율을 기록했으며 최근까지 재기된‘도덕성 의혹’을 생각하면, 그를 마지막까지 지지했던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 추억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가히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의 국민적 애도가 쏟아진 것도 한편으론 이해할만 하다. 고인 앞에선 숙연해지기 마련이고, 다시 만날 수 없음에 대해 나쁜 기억보다 좋은 추억만을 생각하려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일지 모른다. 게다가, 정치인이긴 했으나 그 사람 됨됨이 자체는 결코 정치적이지 못했기에 스스로의 캐릭터를 죽음으로써 완성한 전직 대통령과 그간의 주변 상황을 떠올린다면, 애도의 마음을 갖는 데에 굳이 고인의 열렬한 지지자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죽음은 그런 것일 수 없다. 치료를 요하는 정신적인 질환에 의해서가 아닌 바에야 그 이유가 무엇이든 절대자로부터 주어진 생을 자기 손으로 마감하는 것은 동정받기 어렵다.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결한 의무이다. 하나의 생명이 내포하는 가치는 어떠한 정신적, 이념적 가치보다도 우월하다.‘목적을 위해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태도와‘죽음 자체로 목적을 달성하는’태도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성경을 봐도 목숨을 내놓고 사역을 감당한 이들은 있을지언정(에스더가 그랬고 사도 바울이 그랬다) 제 생명을 목적과 맞바꾼 이들은 찾아볼 수 없다. 신앙이 없는 이에게 이런 교훈이 별 의미를 가질 수야 없겠지만 아버지의 준엄한 판단은 신앙이 있고 없고를 가리지 않는다.


  요컨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죽음 자체의 동기와 배경이 아니요 그 죽음을 통해 드러난 국민적인 목소리일 것이다. 서민 이미지, 탈 권위와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던 모습들, 어쩌면 그것은 서거한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의 한 부분이라기보다, 현 위정자들에게서 보고자 원하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답답하고 지친 마음에 끝 모를 한숨을 몰아쉴 때 “아, 이거 말하는 거였지?”하면서 나의 진정을 보듬어주는 부모의 모습을 말이다.


  이래저래 후폭풍이 거세다. 검찰총장은 도의적 책임을 진다며 사표를 제출하였다.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여야를 가리지 않으며 대학교수들은 앞 다투어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한편 일부 보수층은 ‘체제수호에 자신이 없다면 물러나는 것도 결단’이라며 압박의 수위를 높인다.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가지고 지금도 서울 도심 곳곳에서는 전경과 시민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돌아가는 모양새가 어지럽기 짝이 없다.


  어느 때보다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성도의 기도가 절실하다. 거대한 죽음 앞에 저마다 내고 있는 사회 각계각층의 목소리가 오해나 왜곡 없이 소통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다. 일개 교회의 장로가 아니라 한 나라를 이끄는 신령한 장로로서의 사명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끝까지 감당할 수 있도록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다. 어수선함 가운데에도 말씀의 끈을 놓지 않는 성도의 신앙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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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21] 습관

원고 2009. 9. 14. 19:55 Posted by 오미크론2
(평강제일교회 요셉선교회 주보 제567호 2009. 2. 21)

  지금은 휴직중인 집사람이 회사에 다닐 적에 있었던 일이란다. 어느 날 나이 지긋한 거래처 사장님이 두툼한 미술사(美術史) 책을 한 권 선물했다나. 마침 그쪽 분야에도 적잖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반가운 마음에 말하길, “취업하고 사회인이 되고 보니 일하는 분야 외에는 마음 두기가 쉽지 않아요. 학교에서 전공한 사람만큼 이런 분야에 능숙해지고 싶긴 한데 어째 욕심뿐이네요.”라고. 그런데 이 거래처 사장님 왈,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지금 당장 전공자 수준만큼 되고 싶은 욕심만 접는다면, 그래서 한 10년을 바라보고 즐기는 마음으로 매일 조금씩 시간을 투자한다면 10년 후엔 웬만한 전공자 수준은 될 수 있다.”라고, “나도 그렇게 해왔는데 주변으로부터 ‘혹시 미술 전공하지 않았냐?’는 소릴 가끔 듣는다.”즐기는 마음으로 조금씩 시간을 투자하면 10년 후에는 전공한 사람만큼은 어지간히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열쇠는 바로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의 ‘반복’일 것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논어 옹야 편의 내용 일부를 현대적으로 변형한 이 경구도 결국 같은 말이다. 일주일에 달랑 한 두 시간 할애하는 것을 두고‘즐긴다’는 표현을 갖다 붙이진 않을 게다. 연습이든 학습이든 접고 난 뒤에도 금방 또 하고 싶은 것이 즐기는 것이다. 하고 있자니 즐거워서 나도 모르게 계속 하게 되는 것이 즐기는 사람의 자세다. 즐기면 자꾸 하게 되고 반복은 어느 새 습관으로 이어진다. 10년의 시간을 내 편으로 삼는 방법은 바로 ‘습관’이다.  


  지금은 비록 세상을 등지셨지만 한때 내 신앙의 가장 큰 밑그림을 그려주신 어느 목회자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신앙도 일정 부분은 습관이라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에 참석하고, 새벽기도회로 모이는 것, 각자의 처소에서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는 이런 모든 행위들이 습관이라는 형태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습관은 반복을 수반하고 반복은 숙달로 이어진다. 스스로를 지탱하는 신앙적인 논리가 싹틀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 토양 위에서 습관은 더욱 강화된다. 이른바 신앙적인 선순환이다. 사도 바울이 참아들 디모데에게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고 당부했던 것도 연습을 통한 반복 효과를 기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요셉선교회에 등록한 후 지난 1년 동안 (거의) 단 한주도 빠짐없이 세 아이를 이끌고 경기도 이천에서 이곳까지 와 주일을 성수하는 안 모, 윤 모 요셉 가정의 신앙적인 저력도 그 첫 발자국은 이렇게 시작된 게 아닐는지.


  욕심 부리지 않고 즐기는 마음으로 습관만 잘 잡아준다면 나도 수 년 후에는 신앙의 달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TV에 나오는 ‘생활의 달인’처럼 말이다. 아니, 아니다. 솔직히 달인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이제껏 받은 셀 수 없는 은혜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이면 족하다. 또래별 레이스 집계 결과라며 또래장이 문자를 보내줄 때, 내 이름 옆에만 아무 내용도 적혀 있지 않은 민망한 상황이나마 면하면 될 것 같다. 거기서부터 다시 출발하면 될 것 같다.


  언젠가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습관’이 생겨버린 스스로를 바라보며 참 나태해졌다는 반성을 넘어 이젠 ‘이거 무슨 병 아닌가?’하는 생각에 제법 심각해지기도 한다. 일상의 바다에 푸욱 잠겨있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라면 그 일상을 차고 일어나 경건을 향한 발걸음을 디뎌 나가는것도 다른 모양의 습관일 것이다. 요컨대 필요한 것은 모멘텀(momentum), 즉 현재의 추세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결정적 계기’라 하겠다.


  둘러보면 내 주변엔 계기로 삼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이제 우리도 가정예배 좀 제대로 드리자고 쫑알대는 집사람의 신령한 바가지도 그렇고, 또래별 레이스에 동참하라고 회유와 협박, 공갈과 구슬림의 경계를 넘나드는 또래장의 권면도 역시 마찬가지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새벽예배가 있고, 요셉 동계 워크샵은 마침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구속사시리즈는 곧 3권과 4권이 출간된다고 한다.  


  열거하자니 얼굴만 달아오른다. 제일 쉬운 것부터 하나씩 하나씩 버릇삼고 습관으로 만들어 나가야겠다. 그리고 이 ‘습관 만들기’에 동참할 자원자를 모아야겠다… 어딜 보시나? 바로 당신 얘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