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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2.07.20 제1부. 분단(하)
  2. 2012.07.12 제1부. 분단(상)
  3. 2012.05.15 제2부. 전쟁의 시그널

제1부. 분단(하)

한국전쟁 2012.07.20 23:17 Posted by 오미크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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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분단(상)"으로부터 이어집니다.

45년 10월, 조선해방 축하집회에 운집한 7만여명의 평양시민들 앞에 모습을 들어낸 김일성.
한국 내에 정치 기반이 약했던 김일성은 소련군정의 도움으로 세력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련군정도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조만식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인터뷰]
"처음에 만나서 그 사람(조만식)이 이야기하기를 소련군과 협력할 용의가 없는가. 없다고 했습니다. 세 번 만났는데 세 번 다 거절했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과 협력할 필요가 없다."

이후 조만식은 북한 정치무대에서 사라진다.

46년 2월, 김일성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선출되 행정부를 장악했다. 같은 해 11월, 이북전역에서 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되 이 선거를 통해 기존의 임시 인민위원회가 정식 통치 기구로 정비됐고, 김일성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인민위원회의 첫번째 과제는 친일청산이었다.

[인터뷰]
"인민위원회가 생기면서 제일 첫 째로는 친일분자를 숙청해라 친일분자, 친일요소를 깨끗이 씻어버려라 그 때문에 친일이라고 몰리면 북한에서는 죽었어요. 그 때 그 당시 남한에서는 친일분자가 상당히 아주 그, 날뛰던 때거든." 

인민위원회는 사실상 정부의 기능을 수행했다. 급격한 사회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개혁의 골자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아래 시행된 토지개혁이다. 지주소유지의 85%를 몰수하는 혁명적인 조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 20여일만에 신속하게 완료했다.

토지 개혁 이후 주요 기간산업을 국유화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토지 개혁이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라면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는 체제 유지를 위한 동력과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통치기구 정비와 함께 개혁작업을 완료한 북한은 경제적으로 안정돼갔다.

해방 1년 만에 북한은 남한과는 전혀 다른 사회가 되어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남과 북이 얼마나 다른 것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서로 다른 체제의 선택이 어떤 갈등을 낳게 될런지도 알지 못했다.

[인터뷰]
"성분이 사회 구성의 원칙으로 되어 있어서 소위 말하는 인테리 층이 제대로 채용될 그런 기회가 없는 이런 국가라는 걸 알았을 때 정말 있을 수 없다는 걸 제가 느낀 거죠."

지주, 상인, 종교인, 관리, 경찰 등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급격한 사회개혁으로 생활의 기반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이 남으로 내려왔다. 소련과 북한 인민위원회는 이들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38선 이남 지역은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과 월남민들로 200만의 인구가 늘어났다. 생필품은 턱없이 부족하고 물가는 치솟았으며, 갈 곳 없는 실업자만 늘어났다.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정치적 혼란이 계속됐다.

45년 12월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이 혼란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남북 각 지역의 정치세력과 협의를 거쳐 통일된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한 후 미, 소, 영, 중 4개국에 의한 후견을 한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
언론 보도에 의해 국내에 알려진 모스크바 결정은 신탁통치라는 부분만 강조된 것이었다. 38선 이남지역은 순식간에 반탁운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인터뷰]
"그때 내가 경상도에 출장 갔다 와서 공산당 본부 가니까 주요 간부들은 다 없었어요. 중간 간부들이 앉아서 다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여운형씨를 찾아갔어요. 찾아 가니까 여운형씨도 (신탁통치) 지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박헌영은 평양 가 있었어요. 돌아와서 신탁통치는 지지해야 한다고 그래서 남로당이 신탁통치를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반탁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로 좌익 세력이 입장을 바꾸면서 국론은 극명하게 분열됐고 좌우 대립이 격화됐다. 36년간 식민지배를 받고 이제 막 해방을 맞은 사람들에게 신탁통치란 너무나 민감한 문제였다.

온나라 전체가 탁치문제로 모이거나 갈라져 싸웠고 일상의 삶이 중지된 것처럼 연일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 우익간의 갈등은 남한의 모든 사회 구석까지 파급됐다. 정치계는 물론 직장과, 학교, 지식인, 문화계까지 좌우익의 반목은 첨예하게 나타났다. 특히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반탁은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

[인터뷰]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겁니다. 독립운동자로서는, 임시정부로서는 아무리 당장 죽더라도 그건 용인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그걸 독립운동과 마찬가지로 생각했습니다. 임시정부에서 포고령도 내렸어요, 그때. 미군정이 당황했죠. 신익희 선생 같은 분들은 체포될 각오를 하고선 (반탁운동을) 했어요. 미군정이 체포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하도 반대를 하니까. 당시 반탁운동은 삼일운동하고 비슷하게 거국적으로 했어요."

신탁통치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무시한 것이며 또 다른 예속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김구의 생각이었다.

점차 증폭된 좌우익의 감정적인 대립은 급기야 폭력사태로까지 이어졌다. 47년 3월 1일, 각기 다른 장소에서 3.1절 기념행사를 치른 좌익과 우익의 시위대가 남대문에서 마주쳤다. 순식간에 아수장이 되어 유혈사태에까지 이르렀다.

낯선 풍경이었다. 서로에 대한 이와 같은 격렬한 증오감은 38선으로 분단되기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미군정은 한국인의 이런 격렬한 상태가 무엇에 기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미군정 기간 동안 일제에 협력한 친일관리와 경찰들이 대거 복귀했다. 이에 대한 불만도 점차 높아갔다. 점차 사람들의 얼굴에서 해방의 기쁨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혼란한 정치 상황에 겹쳐 어려운 경제상황에 대한 불만은 점점 증폭되 갔다. 46년 9월, 노동자 총파업이 발생했고 대구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미군정이 실시한 양곡수집제도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된 대구 시위는 삽시간에 경북 지역 일대로 확산됐다.
9, 10월의 총파업은 복잡한 성격을 보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남로당과 미군정의 싸움이었다.

[인터뷰]
"남로당을 조직하려고 하는데 미국이 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네스트 총파업을시작하게 된 겁니다.  미국같이 세계적인 민주국가가 우리가 정치적으로 일을 하려고 하는데 왜 허가를 안해주냐 제네스트 총파업 하면 미국이 세계적으로 큰 창피를 당할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은 불법화되고 체포령이 내려진 박헌영은 월북한다. 당시 38선 이남 지역의 좌익세력은 남로당으로 결집되 있었다. 미군정은 이들의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고 지하로 숨어든 수많은 좌익들이 경찰에 검거됐다. 이 혼란이 가라앉았을 때 좌익은 큰 타격을 입었다.

혼란의 시기를 지내는 동안 38선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불분명했던 선은 점점 더 분명해졌고 더 엄격하게 지켜졌다. 38선은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길 위로도 지나고 길도 없는 들판을 가로지르기도 했다. 대체로 아무 일도 없고 아무 위협도 없는 곳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그 선이 허술하게 방치되는 일은 없었다. 도로 차단기 하나 세운 것 뿐이지만 소련군과 미군에게 38선은 국경이었다.

[인터뷰]
"제가 남한에 갔던 것은 2-3명과 함께였습니다. 미국 장교와 만나기 위해 일부러 간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미국 장교들이 북한을 방문했는데 그들이 거기서 약 20km  떨어져 있는 곳에 주둔해 있다고는 했지만 우리가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건너갈 권리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명령을 준수하고 따랐습니다. 남북한의 국경인 38선을 엄격하게 지켰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소련군은 38선까지만 갔고 장교나 군인들은 그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38선 부근 남쪽 지역은 미군이 주둔할 것이라고 합의된 사항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 땅에서 나고 자라 수없이 아래위, 남과 북을 넘나들며 살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엄포에도 불구하고 그 선을 넘나들었다.

[인터뷰]
"나는 그 때 장사하느라고 살기 어려우니까 원산에서 나는 오징어가 스무 마리 한 축이 싸요 한 열 축을 내가 짊어져 배낭에다 지고 남한에는 고무신이 열 켤레예요 그걸 팔면. 고무신 열 켤레 가져가면 고무신 한 켤레에 쌀 한 말씩이야 이북에서는요. 쌀 한 말이니까 장사가 배 장사가 되죠. 그렇게 했는데 잘못 걸리면 소련군한테 걸리면 다 뺏겨요"

한반도 38선 부근의 긴장만 고조됐던 것은 아니다. 2차대전 이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분명한 세력분할을 이루었다. 자본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간의 동서 냉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자막]
처칠: "발트해에서부터 아드리아해에 이르기까지 유럽대륙을 나누는 ‘철의 장막'이 내려져 있다."

이 무렵 많은 동유럽국가들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했다. 동유럽주민들의 서방 탈출이 잦아지자 이를 막기 위한 조치가 점차 가시화됐다. 그것이 이른 바 철의 장막. 동서 냉전의 상징이었다. 소련은 점점 팽창하면서 유럽을 위협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고심했다.

1946년 그리스는 미국, 영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정부군과 공산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은 반군 간의 내전이 시작됐다. 동서 냉전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리스 내전을 지켜본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다.

[자막]
"오늘날 그리스 정부는 수천의 무장된 공산주의 군대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트루먼 독트린은 미국 대통령 트루먼에 의해 발표된 미국의 외교정책으로서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은 반공정부에 대해서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취하겠다는 선언이다.

[인터뷰]
"트루만 독트린은 일차적으로 소련이 다양한 공산주의 활동을 지원하고 그리스와 터키에 외압을 가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트루만 독트린이 말하는 바는 손 떼라는 것입니다. 손 떼라, 이들 정부를 끌어내리지 마라. 동유럽의 정부가 밀려나고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와 같은 작은 나라들 소위 발틱국가들이 예속화 되었습니다. 당시 트루만으로서는 어떤 독트린, 정책을 고시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공산주의는 전염병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곳에서 쉽게 번식한다며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감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공산주의를 막는 가장 좋은 방어책이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이론 아래 마샬플랜이 탄생했다.

마샬플랜은 유럽부흥계획이다. 2차대전 이후 황폐해진 유럽의 동맹국에 대한 원조와 재건을 약속해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경제가 발달한 곳에는 소련의 이데올로기가 자리잡을 수 없다고 믿었고, 이것은 미국의 냉전정책이기도 했다.

스탈린은 미국의 일련의 행보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공산화시킨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이러한 총성없는 전쟁은 냉전이라는 형태로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될 때까지 근 40년 간 지속됐다.

뜨거운 냉전의 구도 속에 극단으로 대립하던 두 세력이 같은 시기에 한반도에 들어와 38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던 것. 시간이 흐를 수록 38선은 완전무장한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철저하게 지켜졌다. 서로에게 깊은 불신을 가진 소련과 미국이 총을 들이대고 있는 한 분단의 긴장을 제거할 방법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서울과 평양에서 두 번에 걸친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지만 미국과 소련은 모두 아무런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를 거부한 반탁세력에게는 통일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줄 수 없다는 소련의 입장과 모든 정치세력에게 참여 자격을 주어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열린 2차 미소 공동회의는 회담 결렬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기 위한 자리였을 뿐이다. 미국은 소련과의 회담이 더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반도 문제를 UN으로 이관한다. 소련은 대표단을 철수시켰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완전히 결렬됐다.

[음성]
"드디어 단기 4280년 11월에는 UN 총회에서 한국의 선거를 감시하기 위하야 UN한국위원단을 서울에 파견해왔다."

UN 한국임시위원단이 남한을 방문했다.

[음성]
"이날 도착한 위원단은 우리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찾게 하기 위하야 진심으로 노력할 것을 굳게 멩서하며 인사를 교환했다."

임시위원단은 북한과도 접촉했지만 북한은 이를 거절했다. UN총회는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가결했다. 남한의 단독선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UN 임시위원단은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음성]
"… 국민대회를 일으켰다. 우리는 또다시 국가 민족의 흥망을 좌우하는 위기에 당면하자 가능한 지역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자는 이승만 박사의 주장에 따라 …"

이승만은 이미 46년 정읍 발언[井邑發言]을 통해 남쪽만이라도 정부 혹은 위원회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인터뷰]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 오래 계시고 그래서 국제 정세에 밝았다고요. 국제 정세에 비추어 볼 때. 국제 정세를 판단하는 통찰력이 빨랐다고. 아, 이거 안되겠다. 벌써 이북은 단독 정부를 세우고 있다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정읍 발언을 하면서 불가피하다 하는 것을 말씀을 하신 거예요."

단정 수립을 반대하던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협상을 제의했다. 남한의 단독선거 움직임을 맹렬히 비난하던 북한은 남북연석회의를 제안해 왔다.

김구와 김규식의 제안에는 답이 없던 북한이 일방적으로 남북연석회의 소집을 발표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남한 지도자들을 초청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회의에 참석했다.

[김구 연설]
"조국분열의 위기를 만구(挽救)하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하여 민주자주의 통일독립을 전취할 대계를 상토(商討)하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독립운동사의 위대한 발전이며, 이와 같은 성대한 회합에 본인이 참석하게 된 것은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인터뷰]
"우리가 통일이 안되면은 민주도 없고 자주도 없고 심지어는 동족상잔까지 되는 것이다. 벌써 그 때에 예견을 하고 발표했어요, 김구 선생이. 6.25 전쟁을 벌써 그 때 얘길 했습니다. 통일 안 하게 되면 결국은 둘이 갈라지면은 전쟁이 일어난다."

남북연석회의는 실질적 성과 없이 끝났다.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해 나섰던 김구와 김규식은 48년 5월 5일 깊은 실망을 안고 38선을 넘어왔다. 이제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불안 속에서 분단 국가의 수립은 곧 동족 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지리라 예감했다. 이 모든 갈등과 분쟁의 시작이 된 건 부자연스럽게 생겨난 하나의 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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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분단(상)

한국전쟁 2012.07.12 12:28 Posted by 오미크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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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이고 찬란한 것들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인간은 늘 그런 매혹적이고 찬란한 것들을 열망해 왔다.
20세기 초, 그 열망은 자본주의 미국으로 상징됐다.

비슷한 시기, 평등과 계급 해방을 기치로 내건 러시아 혁명이 성공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탄생.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전쟁의 서막이었다.

1차 대전 패전으로 고통받던 독일 국민은 히틀러의 등장에 환호했다.
민족의 우월성을 외치며 강력한 군국주의를 표방한 나치 독일은 또다시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아시아 역시 평화를 잃었다.
천황 중심의 군국주의 일본은 이미 한반도와 만주를 침략한 후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세력권을 확장하고 있었다.

주권을 빼앗긴 채 일제의 압제 아래 놓여있던 한반도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총을 들고 전장으로 끌려가 침략자 일본을 위해 총알받이가 되어 사라졌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 비행기가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 미군 기지를 향해 폭격을 퍼부었다. 2차대전에서 한발 물러나 있던 미국은 진주만 공격으로 인해 참전을 선언했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하던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로 겨우 전세를 역전시켰지만 일본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 무렵 나치 독일은 독.소 전쟁을 시작했다. 유럽 서부 전선에서 승승장구하던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것이다.
그러나 모스크바 함락에 실패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도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나치 독일의 동부전선은 급격히 무너졌고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서부 유럽 전선에도 큰 변화가 예고되었다.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으로 상륙한 것이다. 사상 최대 규모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승기를 잡은 연합군은 나치 독일을 압박하며 독일 본토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나치 지배 아래 있던 파리를 탈환했고 해방을 맞은 파리는 미국에 환호했다. 전쟁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노르망디에서부터 독일 본토를 향해 진격하던 미군과 스탈린그라드에서부터 나치 독일을 향해 반격하던 소련군이 베를린 근교 엘베 강에서 만났다.

[인터뷰]
“아주 기쁘고 따뜻하게 그들을 맞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영어를 몰랐고 미군도 러시아어를 몰랐죠. 서로 기뻐하며 몸짓과 얼굴표정으로 의사소통을 했죠. 그때 소련군은 군 식량이 있었고 미군과 함께 둘러앉아 보드카와 음식을 함께 마시며 승리를 위해 건배했죠"

나치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미국과 소련은 동맹이 되어 싸웠다.
베를린은 함락됐고 히틀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독일의 영토는 연합군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됐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질 무렵 영국의 처칠과 미국의 루즈벨트가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만났다. 2차 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은 스탈린이었다.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스탈린은 얄타 회담에서 독일의 분할 점령과 동유럽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를 보장받았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지속적으로 대일전 참전을 요청했다. 길어지는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미군의 피해가 막대해졌기 때문이다.

[인터뷰]
“미국은 2차 대전 동안 소련에 대해 강한 호의를 보였습니다. 스탈린은 2차 대전 내내 지속적으로 미국을 압박했습니다. 소련이 독일과 싸우는 동안 미국은 일을 충분히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보험이 필요했습니다.”

스탈린은 독일이 항복한 이후에 결정하겠다며 확답을 미뤘다. 그의 관심은 아직 유럽에 있었다.

독일의 항복으로 유럽의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태평양 전선은 참혹했다.

45년 6월,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했지만 일본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쉽게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미군의 피해는 커져갔다.

45년 7월 미국, 영국, 소련의 세 거두가 포츠담에 모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루즈벨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트루먼은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인물이었다. 

회담 직전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비밀 전문을 받을 수 있었던 트루먼은 소련의 도움없이 일본을 단독 점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은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끔찍한 고통은 오래도록 계속됐다.

일본에 원폭이 투하된 직후, 소련군이 대일전 참전을 선언했다. 소련으로서는 전투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실리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소련의 태평양 함대는 웅기, 나진에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인터뷰]
“조선 반도를 통치하던 나남사단, 일본군 나남사단. 무서운 사단이었습니다. 한반도를 통치하던 나남사단이 흰 기를 들고 투항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 때 내가 울었습니다. 너희 놈들도 우리 앞에 투항할 때가 있구나 하는 것을 내가 느끼고 상당히 참 감동했습니다.”

무서운 기세로 남하하던 소련군은 개전 6일 만에 이미 한반도 북부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

당시 미군은 아직 오키나와에 있었다. 한반도에서 천km나 떨어진 곳이다.

미군은 소련군이 한반도를 단독 점령할 것을 우려해 한반도 점령 계획 일부를 수정했다. 하지 중장의 24군단을 중화기 없이 경장비만 갖추게 하고 급히 한반도로 이동시켰다.

예상치 못한 소련의 참전과 빠른 남하 속도에 당황한 미국은 소련의 단독 점령을 막기 위해 분주해졌다.

[인터뷰]
“우리는 38선을 3성조정위원회에 제시했는데 위원회는 그 안을 채택했고 소련도 즉각 그 안을 수락했습니다.”

단지 두 점령군의 작전 지역을 구분하기 위한 선. 그것은 북위 38도 선이었다.

[인터뷰]
“1945년에 한국은 스탈린에게 어떠한 중요한 의미도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일본과 중국이 있었고 일본은 파괴하고 약화시켜야했던 나라였습니다.
스탈린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주에서부터 38선 지점까지 군대를 동원하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인터뷰]
“실수는 아시아에서 미래를 결정하는데 소련에게 동등한 지위를 준 것입니다.
특히 한국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소련은 단지 6일 동안 극동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스탈린이 한 일은 그게 다였지만 북한에 손을 뻗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독일처럼 38선에 의해 나라가 분리됐습니다.”

북위 38도선이라는 낯선 경계는 일반명령 1호에서 처음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일본군 대본영(大本營)은 미국의 지시대로 항복 절차와 방법을 명시해 각 지역에 있는 일본군에게 하달했다.
두 점령군을 위한 경계선. 38선은 이렇게 처음 한반도에 나타났다.

1945년 8월 15일.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1주일 만에 일왕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 

2차대전의 완전한 종말. 일본의 패망으로 군국주의의 망령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게 됐다.

한반도는 해방의 감격에 휩싸였다. 일본은 물러갔다. 다시 제 나라의 주인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토록 염원하던 자주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게 된 한반도는 희망과 희열로 넘쳐났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해방과 함께 분단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소련군은 한반도에 진주하자마자 도착 성명을 통해 자신들이 해방군임을 강조했다.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인터뷰]
“평양으로 전차와 탱크를 타고 진격했을 때 북한 사람들이 좌우로 길가에 늘어서서 우리가 전차와 탱크를 타고 입성하는 것을 환영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나중에 이러한 관심과 예절을 그 어느 곳에서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해방군에 대한 주민들의 환영은 뜨거웠다.

미군은 일본이 투항한 지 3주가 지나서야 한반도에 들어왔다. 하지 중장이 이끄는 24군단이 인천에 도착했다. 

미군 진주의 분위기는 소련군 진주 때와는 사뭇 달랐다. 어디까지나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한 군사작전일 뿐이었다. 미군은 진주할 때까지의 치안 유지를 일본 경찰에게 맡겼다.

사람들은 미군 역시 해방군으로 맞아들이며 환영했지만 조선인에 대한 미군의 태도는 엄격했다. 미군은 동맹군이자 점령군으로 비춰졌다.

38선 이남 주민들이 미군 진주 소식을 들은 것은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기 전, 서울 상공에 뿌려진 맥아더 포고문을 통해서였다. 한국인에 의한 어떠한 자치단체도 인정하지 않으며 명령을 위반하면 엄중히 처벌한다는 고압적인 내용이었다.

미군은 한반도에서 무장 해제시킨 일본군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했다. 한반도를 점령한 미군이 경계해야 할 대상은 이미 패전국 일본이 아니라 동시에 한반도에 주둔해 있는 소련군이었던 것이다.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 17방면군은 소련의 한반도 단독 점령 위협을 미군에게 과대 부각해서 보고했다. 이러한 왜곡된 정보는 미군의 초기 점령 정책에 영향을 끼쳤다.

[인터뷰]
“맥아더 장군은 매우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지금 읽어보면, 한국이 일본의 피해국이라기보다는 적국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이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국무부는 한국이 적국이 아니라 침략의 피해자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터의 군 관계자들은 한국을 적국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인들이 국제정서에 어두웠던 것 이상으로 미군은 한반도 사정에 무지했다. 미 군정은 모든 정보를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군에게 의지했다.

서울에 입성한 하지와 미군부는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와 마주 앉았다. 항복 조인식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조선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미군에게 이양하는 자리였다. 

조인 문서 5조에는 일본의 문무관 모두를 그 자리에 유임하기로 했다. 미군은 아직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이 어떤지를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일장기가 내려질 때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인은 여전히 미국과 소련 연합군을 해방군으로 믿었고 곧 머지 않아 한국인에 의한 정부가 세워지리라 생각했다.

해방 직후 가장 신속하게 대처한 정치세력은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였다. 건준은 전국에 백 마흔 다섯개 지부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조직화되어 있었다.

미군 진주 소식이 전해지자 여운형 주도의 건준은 정부로 인정받기 위해 인민공화국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해외 독립운동가의 명성을 안고 귀국한 이승만. 

그러나 귀국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육성]
"하지 장군은 그 익일(다음 날)에 떠나서 서울로 가고 나는 수 일 쉬어가지고 오면 좋겠다고 해서 저는 3일 쉬어서 어제 아침 동경을 떠나서 어제 오후에 서울에 와서 내렸습니다."

미국 내 일부 세력은 이승만의 귀국을 탐탁치 않아 하며 귀국을 방해했다. 이승만은 미국 정보부와 군부의 후원 하에 한국에 들어왔다.

[육성]
"한 마음 한 뜻으로 우리 조선의 완전 무결한 독립을 차지하는 것이 나의 제일 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기회는 전무한 기회요 또 후무할 것입니다."

미 군정은 처음 얼마 동안은 이승만과 협력하면서 그를 강력히 후원했다.

임시 정부 요인들의 귀국은 이승만 때보다 더 어려웠고 거의 수모에 가까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인터뷰]
“11월 5일에 중경을 떠나가지고 중국 비행기로 상해로 나왔어요. 상해에 나와서 18일간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미군정의 비행기가 와야 서울에 올 수 있거든요. ‘개인 자격으로 각서를 써라’ 임시정부 요인들은 ‘쓸 수 없다. 독립운동 하던 사람이 어떻게 개인 자격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 그냥 들어가야겠다’ 이래서 18일 동안 머물다가 각서를 쓰고 들어갔습니다.”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바치고 꿈에 그리던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미 군정은 임시정부를 정부로서 승인하지 않았다.

한반도 어디에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단지 지도 상의 선으로만 존재하는 38선이 실질적인 힘으로 한반도를 나누었다.

미군과 소련군이 마주하고 있는 38선 접경.

현장 군인들은 서로에게 우호적이었다. 유럽의 엘베강에서 그러했듯이 그들은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향해 함께 싸운 동맹이었다. 38선은 아직 긴장과 충돌의 선이 아니었다.

점령 초기, 소련군은 한국인에 의한 일부 자치 조직을 합법적으로 승인했고 이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소련 군정은 주민들과 친밀해지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함께 소련에 우호적인 정치 세력을 키우기 위한 작업도 진행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평남도지사 후루가와로부터 항복서명을 받아냈다. 그 후 소련군정은 평안남도 인민위원회에 행정권을 이양했다. 당시 북한의 대표적인 지도자는 민족주의자 조만식이었다.

[인터뷰]
“민주당을 구성을 해가지고 북한으로서는 아주 대표적인 우리나라의 지도자로서 추대가 됐던 사람이지요. 평안남도 인민 정치 위원회라고 하는 것이 구성이 되가지고 조만식 선생이 그 위원장으로 취임하게 됐어요.

그리고, 김일성이 입국했다.

[인터뷰]
“45년 9월 19일 그게 바로 8월 추석날입니다. 25군단 정치부에서 지시가 왔어요. 내일 아침에 김일성 일행이 태평양함대 운송함 부가초프호를 타고 원산에 도착한다. 아침 8시경에.
배에서 내리는데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지 오래거든요. 나는 그 사람이 상당히 나이도 많고 머리도 희고 웅장하고 정말 장군다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배에서 내리는 걸 봤습니다. 한 사람도 그런 사람이 없어요."

"제1부. 분단(하)"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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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전쟁의 시그널

한국전쟁 2012.05.15 20:29 Posted by 오미크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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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그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48년 2월, 조선인민군이 창설됐다. 북한 정부가 공식 출범하기 7개월 전이었다. 

[음성] "조선 민족의 역사상 처음으로 인민 자신의 군대를 가지게 됩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학살과 탄압을 당하던 우리 조선 인민은 이제는 자신을 보위하는 당당한 인민군대의 자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38선 이남이 단독선거준비로 혼란스러웠을 때 3개의 보병사단을 기간으로 하는 2만 7천명의 군사조직을 완비한 것이다.

그 당시 북한은 정부의 역할을 하는 인민위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46년 2월에 조직된 임시 인민위원회는 11월 선거를 통해 대의원을 뽑았다. 

위원장으로는 김일성이 선출됐다. 북한 내 민족주의 계열의 지지를 받았던 조만식은 신탁통치안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소련에 의해 제거된 상태였다.

[인터뷰] "그(조만식)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완벽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훗날 저는 그가 조만식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그가 잠만 자는 늙은 노인이 아니라 매우 활기찬 사람이라는 것을 그의 언행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졌는데 우리는 한국의 장래에 대해 논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조만식은 대체적으로 반동주의자였습니다. 비록 그가 평양인민위원회 의장이긴 했지만 그는 반인민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후 인민위원회를 통해 김일성은 북한의 소비에트화를 강력히 추구해 나갔다.

많은 지하자원과 수력발전소, 일제 강점기 때 남겨진 산업시설들, 여기에 토지개혁과 같은 사회주의 개혁을 과감하게 실시하면서 북한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해갔다. 

38선 이북 지역의 실질적인 정치책임자였던 스티코프는 당시의 경제상황을 세세한 부분까지 기록해놨다.

그의 메모에 따르면 1947년 북한은 석탄, 화학, 경공업, 발전소, 수확량, 어획량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목표량을 100% 이상 달성하고 있었다.

해방 1년여 만에 38선 이북은 이남과는 전혀 다른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47년 11월엔 헌법제정위원회가 구성되 북한 헌법의 기초 작업에 들어갔다.

조선인민군 창설, 공화국 헌법 기초 작업 등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를 치밀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남한 사회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실업율은 높았고 물가는 뛰어올랐다. 식량과 생필품은 부족했고 전력란까지 겹치면서 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UN의 남북한 총선거 제안에 대한 북한의 거부 이후, 남한만의 단독선거실시 여부를 놓고 남한 사회는 분열되었다.

[음성] " ... 국민대회를 일으켰다. 우리는 또다시 국가 민족의 흥망을 좌우하는 위기에 당면하자 가능한 지역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자는 이승만 박사의 주장에 따라 세계 여론에 호소했다."

남한만이라도 단독 선거로 정부를 수립하고 이후 점진적으로 통일을 하자는 이승만.

반면 김구는 남북한 통일 총선거를 주장했다.

중도 우파의 대표적인 인물 김규식 역시, 단독 선거는 분단이라며 김구와 뜻을 같이했다. 

남로당은 무력 투쟁으로 남한의 단독 선거를 반대했다. 

총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두고 제주도에서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제주도는 4.3사건이라는 비극에 휘말리게 된다.

미 해군 함정이 섬을 봉쇄한 가운데 국방 경비대와 경찰이 동원됐다. 당시 미 군정은 제주도의 사태를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제주도는 해방 후부터 군정 경찰과 서북 청년단의 횡포, 그리고 육지 사람들에 대한 불만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안고 있었다. 여기에 단독 선거 반대와 좌익의 개입 등 사태의 원인은 복잡했다. 

[인터뷰] "군대는 아니고 경찰이 말이야 그 때 몇 사람이 말을 타고 다녔는데 말이 어린 아이가 길가에 있는 것을 발로 밟아버리고 그랬어요. 그래서 항의를 하니까 항의한 사람들 다 잡아가고 그랬어.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이 일어서 버렸어요. 일어섰는데 말하자면 공산당이 지지했다고. 어느 정도 지지한 것은 사실입니다."

4.3 사건의 여파로 제주도에서는 국회선거를 제대로 치를 수 없었다. 

군경의 토벌 작전은 이듬해 봄까지 계속됐다. 진압 과정에서 좌익으로 몰린 양민들이 억울하게 희생되면서 제주도는 오랜 세월 고통의 섬으로 남았다.

선거를 1주일 앞두고 혼란은 절정에 달했다. 협박과 테러로 많은 사람들이 피살됐다.

하지만 선거 당일은 비교적 순조롭게 선거가 진행됐다. 유권자 80% 이상이 등록한 가운데 투표율은 95.5%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독립국가를 수립한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참여의식을 경험하고 있었다. 

총 백 아흔 여덞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된 가운데 보수적인 한민당 계가 약 80여석, 이승만 계가 60여석, 임정계가 쉰 일곱석을 차지했다.

[음성] "현 정부는 전국 완전한 한국 전체를 대표하는 중앙정부임을 이 또한 선포하는 바입니다."

남한이 한국을 대표하는 국가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국회는 다수당인 한민당의 지지속에 90%가 넘는 득표율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인터뷰] "그는 물론 나이가 많았어요. 그는 훌륭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표정은 온화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표정은 가면이었어요. 그 가면 뒤에는 아주 강인하고 강건한 사나이의 모습이 숨어 있었죠. 물론 그는 그의 많은 생을 외국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고집쟁이였고 한국을 위해 최상의 것을 원했습니다. 그가 한국을 위해 최상이라고 하는 것이 항상 미국인들이 한국을 위해 최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일치되지 않는 점이 많았습니다."

48년 8월 15일 해방된 지 3년. 일제에 의해 주권을 상실한 지 38년 만에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의 절반이 제외된 남한만의 정부였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인민위원회가 통치하고 있던 북한 역시 공식적인 정부 수립에 나섰다.
지금까지 남북한이 함께 사용했던 태극기가 내려지고 인민공화국기가 올려졌다. 이제 남과 북은 각자의 깃발 아래 따로 서게 된 것이다. 

8월엔 남한의 좌익 세력 일부가 비밀리에 황해도 해주에 모였다.

해주에서는 남조선 대표자 회의를 열어 최고인민 회의의 남한 대표를 선출했다. 이것은 북한이 한반도 전체의 대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남한 정부 수립 열흘 뒤 북한의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을 뽑기 위해 총선거가 실시됐다. 

제1차 최고 인민회의가 소집됐다(1948년 9월 2일). 내각 수상으로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이 선출된다.

[인터뷰] "(김일성은) 보촌보 전투를 통해서 조선 내에서 가장 유명한 리더였습니다. 김일성은 젊고 융통성이 있고 소련으로서는 조종을 할 수 있었고 (소련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 교육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48년 9월 9일 북한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선포됐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이들 두 정부의 공식적인 수도는 모두 서울이었다. 똑같이 서울을 수도로 한 두개의 정부는 하나의 레일 위에서 마주보며 달리는 폭주기관차처럼 위험한 관계였다.

[인터뷰] "한반도 분열은 전쟁을 위한 필요는 아니지만 충분한 조건이었습니다. 또한 두 개의 완전히 다른 형태의 정부와 군대가 이어졌습니다. 전쟁이 났을 때 하지 장군 조차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에게는 전혀 놀라운 게 아니라네. 한국은 아시아에서 항상 분쟁 지대라고 여겼다네>>라고 했습니다."

남한은 정부 수립 후, 곧바로 한미간의 행정 이양식이 이어졌다. 

3년 간의 미 군정의 시대도 끝이 났다. 이제 모든 것을 한국인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했다.

정부 수립에 맞춰 국군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국가 주권의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군대를 갖게 된 것이었다.하지만 대부분이 미국의 지원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군대였다.

국군의 모체는 1946년 1월 창설된 국방경비대였다. 당시 무장과 편제에 있어 군사 조직이라기 보다는 치안 예비조직에 가까왔다.

[인터뷰] "미국의 정책에 의해 창설된 경비대기 때문에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중립도 아니고 저희들은 오로지 국내의 치안만 담당하는 경비대로서 그 장비도 일본군이 쓰다가 던지고 간 38식 소총에다가  일본군들이 버리고 갔던 군복들을 저희들이 그대로 몇달동안은 착용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국방경비대를 모집할 때의 전형은 신체 검사와 구두 시험 뿐이었다. 

지원자에 대한 사상 검토나 신상 조사는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의 탄압으로 차츰 활동영역이 좁아지고 있던 좌익 세력에겐 군대는 안전한 피난처였다.

[인터뷰] "자격 심사 그런 것도 그렇게 심하게 따지지 않았지. 미국아이들이란 건 지금도 그렇지만 자기는 민주주의 식으로만 생각하거든. 자기는 미국식으로. 그 한국의 실정에 대해서 잘 파악 못하고 그러니까 이제 좌익도 들어오고 전과자도 들어오고 그랬다니까."

이미 좌익이 불법화된 국가에서 이들은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 폭탄같은 존재였다. 

우려가 현실화된 것은 여수에서 였다. 제주 사태 진압을 명령받은 14연대 좌익군인들이 출발 직전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경제 악화와 부패한 경찰에 불만이 쌓였던 일부 주민들이 가담하면서 순천까지 반란의 불길이 번졌다. 수백명의 경찰과 공무원 우익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출범한 지 2개월 밖에 안되는 이승만 정부에게 여순 사건은 중대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승만은 정권의 사활을 걸고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남한 병력의 4분의 1이 동원됐다. 광주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여수와 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인터뷰] "여수에 가니까 종고봉이라고 종고산, 거기까지 가니까 날이 어두워졌어요. 어두워졌는데 보니까 14연대 반란군들이 자동차를 타고 벌건 기 달아 가지고 왔다 갔다 합디다."

여수는 흡사 전쟁터와 같았다. 

반란과 진압의 혼란 속에 시가지는 지옥으로 변했다. 양민과 폭도의 구분이 모호한 상황 속에서 억울한 희생자들이 잇다랐다. 

[인터뷰] "서국민학교 교문에 들어서니까 거기 우익 측 사람들, 경찰관들 쫙 서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이를 지나가요 거기서 사람이 지나간 뒤에 그 사람들이 뒤에서 이렇게 가리키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끌려가서 뒤쪽으로 가서 그냥 총살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때 손가락 총이라는 말이 유행을 했지요."

10월 27일 토벌군은 여수 전역을 탈환했다. 반란군과 그에 가담한 좌익 세력도 검거됐다.

미국의 입장에선 여순 사건이 이승만 정부가 스스로 존립할 수 있을지를 판단하는 시험대가 됐다.

[인터뷰] "이 사건이 조기에 진압된 결과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 정부의 위신이 크게 세워졌습니다. 남부의 산악지방과 제주도에 얼마간의 공산주의 게릴라가 출몰한 것 외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토벌군에 밀린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도주해 게릴라 전을 전개했다. 이 때부터 남로당은 본격적인 게릴라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이듬 해 2월, 계엄이 해제되었고 반란 주모자들에 대한 처형도 진행됐다. 

반란은 진압됐다. 그러나 좌익에 대한 본격적인 응징은 그 때부터 시작됐다. 

전체 군인의 5%에 달하는 4천 7백여명의 군 내 좌익 세력이 숙청됐다. 이후 국가보안법 제정과 반공 사상 강화 등 여순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반공 정책을 강화해 나갔다.

북한 정부 수립에 발맞춰 소련군의 철수도 진행되고 있었다. 북한 정부가 수립된 지 불과 백일 만인 12월 말까지 철군을 끝낸 건 모스크바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아직 남한에 남아 있는 미군에 대한 무언의 압력이었다.

[인터뷰] "소련 정부는 미국이 그들 군대를 한국에서 철수하는지 여부에 관계 없이 소련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군대를 철수함으로써 미국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것이며 모든 상황이 미국으로 하여금 군대를 철수시키도록 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남한 정부 수립 후 미군 역시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 내전이 마오쩌둥의 공산당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철군을 연기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까지 철군을 마무리한 상황에서 미국은 더 이상 철군을 미룰 수는 없었다.

[인터뷰] "당시 군부 입장은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하자는 입장이었고 나를 포함한 국무성의 입장은 철수 반대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은 원칙적으로는 우리와 동조하는 입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장군의 끈질긴 설득으로 트루먼 대통령은 결국 철수를 지시하게 되고 우리는 남한에 대한 침략의 위험성이 가중되리라 염려하여 철수에 극구 반대를 했던 것입니다."

48년 말부터 미군도 철수하기 시작했다. 38선의 경비는 남한군에게 맡겨졌다. 38선을 그은 장본인들은 떠나고 38선을 원치 않았던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기묘한 상황이 펼쳐졌다.

남북의 완충 역할을 했던 미소군을 대신해 남한과 북한의 군대가 38선에 마주섰다. 38선은 미국과 소련이 자로 긋듯 인위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형적인 특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산과 강 위로 그어진 38선은 그 경계가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상대의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두 개의 군대가 마주서자 물리적 충돌이 시작됐다. 당시 충돌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개성 송악산 전투였다. 송악산의 주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처음으로 연대급 병력이 투입됐다.

[인터뷰] "송악산에서 내려다보면 488고지가 있어요. 거기에 인민군이 제가 볼 때 한 일개소대 돼가지고 우리 그 송악산을 쳐다보고 말이죠 그 다음에 포사격을 하면 우리 개성시내까지 포탄을 뚫어 치는 그런 그 요충지더라고요 그래서 거기 피아 간에 굉장히 전투가 뭐 주간야간으로 이 뭐 수시로 있었어요."

개성에서 시작된 전투는 멀리 황해도 옹진까지 확대됐다. 지리적으로 남한과 떨어져 고립된 옹진 지구는 남북간의 충돌이 가장 빈번한 곳이었다. 남한은 옹진을 방어하기 위해 전투사령부까지 설치하고 연대급 병력을 투입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적대감이 깊어갔고 남과 북은 그 어느 쪽도 물러서거나 자제하지 않았다.

[인터뷰] "옹진에 도착해서 이틀 후에 국사봉 1고지, 2고지까지 점령했죠. 3고지는 점령을 못 했습니다. 인민군이 원래 숫자가 많더라고요. 6고지까지 점령하게 되면 인민군이 6km 후퇴해서 주둔하게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어떻게 해서라도 6고지를 점령해야 한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38선 경계를 넘나드는 경우도 있었다. 옹진 반도에서 북한군이 점령한 두락산은 이 남, 남한군이 차지한 국사봉은 이 북에 있었다. 

38선에선 1949년부터 일년 반 동안 무려 칠백 예순 건에 달하는 충돌이 벌어졌다. 이곳은 당시 세계적으로 격화된 냉전의 최전선이었고 이미 작은 전쟁은 시작됐다.

[인터뷰] "38선 충돌의 중요한 요인은 미군을 향한 시위 효과가 컸습니다. 군사 원조를 더 받아내려고 하고 미군 철수를 늦추려고 하는 그러나 반대로 김일성 쪽 북한 쪽에서 38선 충돌을 격화시킨 것은 남한의 체제를 흔들어 놓으려는 측면과 함께 동시에 스탈린, 소련을 향해서 항상 휴전선이 불안하고 이승만 정부가 이렇게 언제든지 북침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그런 측면이 컸습니다."

이 무렵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새로운 계획을 제안했다. 

그것은 옹진반도에 있는 한국군을 소멸시키고 그 지역을 점령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옹진과 해주의 점령이 자칫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해 공격을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남북한의 싸움은 38선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춘천 지역을 지키던 두 개 부대 대대장이 대대원들 일부와 가족을 이끌고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북한은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통해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49년 6월엔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이 결성됐다. 여기에서 내놓은 제안은 UN 한국 위원단이 한국에서 철수할 것과 통일의 전제 조건으로 이승만의 축출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이승만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장애물이었다. 북한은 이승만 정부를 교란시키기 위해 강동 정치학교에서 양성한 게릴라들을 침투시킨다. 

남한을 뒤흔든 게릴라 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남쪽에서도 북한에 게릴라를 보냈다. 하지만 북한의 공고한 체제 때문에 대부분 실패했다.

1949년 여름, 침투 도중 발각된 호림 부대도 그 중의 하나였다. 북한은 공개 재판을 열어 남한의 침공을 대대적으로 선전한 뒤 이들을 처형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됐다.

김구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뤄졌다. 이승만은 참석하지 않았다. 김구의 죽음으로 통일정부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도 사라졌다.

그 즈음 남한의 최대 현안은 미군 철수 문제였다.

[인터뷰] "이승만은 1949년 5월 31일 미군 철수를 저지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방법을 동원했는데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탄원서를 보내 미국의 철군 결정을 비난하기도 했고 한국 국회에서 결의문을 통과시켜서 미국에 철군에 대한 생각을 바꿀 것을 촉구하기도 합니다. 유엔에다가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탄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두 시위를 통해서 한국 국민들이 미군 철군을 반대하는 것도 보여줬습니다."

1949년 6월 말, 남한 정부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긴 채 완전히 철수했다. 이로써 한반도에 미소군이 주둔하던 시대는 끝이 났다.

이제 남한은 모든 국가적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떠났지만 군 예산과 무기의 대부분은 여전히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주장했다. 일부 군지도부들도 이에 동조했다. 여기에는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미국은 당시 남한 지도부의 북진 통일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바람과는 달리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이 위험한 일이라고 인식했다. 

[인터뷰] "사실은 미국의 군사원조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원조가 너무 많을 경우 이승만이 북진할지도 모른다는 미국 정부의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기억할지 모르지만, 처음부터 이승만의 구호는 북진 통일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미국 측에서는 이승만에게 공군병력 지원도 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49년 3월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김일성은 1949년 신년사에서 국토 완전론을 주장했다. 이것은 북한을 혁명기지로 삼아 남한 지역의 혁명을 완수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북한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련의 허락과 지원이 있어야만 했다.

[자막] "정부간 회담차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대표단이 도착했다. 외무장관 그로미코 동지와 각료회의 부의장 미코얀 동지가 영접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무원 수석 김일성 동지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정무원 부주석 겸 외무장관 박헌영 부주석 홍명희가 동행했다."

김일성은 스탈린과의 만남에서 경제 원조 등을 논의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반도 통일 문제였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북한군이 강력하지 못하며 남한에는 아직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미국과의 협정을 깰 수 없다며 김일성의 전쟁 계획에 반대했다.

(자막: "북한군은 남한군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남한에는 아직 미군이 있다. 소련과 미국 사이에는 아직도 38선 분할협정이 유효하다.")

김일성의 반발에 스탈린은 남한이 공격해 온다면 이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자막: "적들이 침략의도가 있다면 조만간 먼저 공격해 올 것이다. 그러면 절호의 반격 기회가 생긴다.")

[인터뷰] "김일성이 남한에서 좀 더 저항 세력을 더 넓혀가길 바랐던 것이었습니다. 남한국민이 선동되고 분열될 때 그때야 비로소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을 침투하고 이승만 정권을 뒤집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 바로 스탈린의 생각이었습니다."

당장의 남침 동의는 얻지 못했지만 그 방문으로 김일성은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바로 조.소 경제문화 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겉으로는 단순한 경제협정이었지만 그 안에는 군사 원조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음성]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 대표단은 우리에게 뜨거운 환영과 만족한 교섭 결과에 대하여 소련 정부와 스탈린 대원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위대한 소련 인민과 조선 인민과의 영구불멸한 친선 만세 소련 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시며 조선 인민의 친근한 벗인 스탈린 대원수 만세"

김일성의 소련 방문 이후,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무기 지원이 이루어졌다.

[인터뷰] "소련배는 도착해 있어요. 거기 정박해 있어요. 무기를 인수하고 인양하는데 그 배의 보안 유지를 내가 책임지게 되었어요 거기 노동자들은 지방 당에서 지방 정치보위부에서 동원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배에서 그게 8000톤급 배였어요. 거기에서 인양된 것이 그 당시 무전기, 대포, 사이드카 이런 것을 보통 한 열차가 열 한 열차인데 일주일 실어 올렸어요."

소련은 탱크와 대포, 대공포 그리고 전투용 항공기 등을 지원했다. 이로써 인민군은 공격군으로서의 화력을 갖춰 나가며 김일성의 계획에 날개를 달게 됐다. 

한편 중국의 상황은 극변하고 있었다. 미국의 지원 속에 장개석의 국민당이 승전하는 듯 했지만 전세는 역전되고 있었다.

미국의 개입을 우려한 스탈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양쯔강 도하작전을 감행해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했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위기에 몰렸고 마오쩌둥이 중국의 새 주인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내전 당시 국민당에게 쫒기던 공산군은 북한을 피난처로 삼고 물품을 제공받기도 했다. 승리가 공산당으로 기울 즈음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국공 내전에 참전한 한인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49년 여름, 김일성의 요청으로 마침내 북한으로 넘어온 두 개의 한인 사단 2만명은 각각 인민군 6사단과 5사단이 됐다. 다음 해에도 한인 부대 한 개 사단이 추가로 도착했다.

병력은 증가했고 막강한 화력과 병력을 갖추며 북한군의 전투력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전투 경험이 많은 한인 부대는 북한군의 핵심 병력이 됐다.

[인터뷰] "김일성의 인민군의 군사 수를 늘리기 위함이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부대들은 모두 전쟁 경험을 통해 단련이 되어 있었고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후에 한국전쟁 과정에 있어서 사실 핵심적인 주력군의 역할을 한 것은 조선족 부대였습니다."

1948년에서 49년으로 접어들면서 국제 사회는 냉전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 냉전의 가장 위험했던 대결의 하나가 11개월에 걸친 소련의 베를린 봉쇄였다.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미.소를 중심으로 두 개의 적대 진영으로 갈라졌다. 유럽에서 미.소 간의 긴장이 절정에 달한 곳은 독일이었다.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각각 분할됐고 동독 안에 있던 베를린 역시 동서로 나뉘었다. 

48년, 소련은 서베를린을 잇는 모든 육로를 봉쇄했고 미국은 이에 맞서 베를린에 식량과 물자를 공수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11개월 만에 베를린 봉쇄를 풀었고 이어 독일 연방 공화국과 독일 민주 공화국이 세워졌다.

1949년 8월, 소련은 원폭실험에 성공하게 됐다. 이로써 미국의 핵무기 독점시대가 끝나고 냉전 시대의 판도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 모인 군중 앞에서 마오쩌둥은 새로운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했다. 소련과 함께 공산주의의 큰 축으로 떠오른 중국. 중국의 공산화는 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 질서의 재편을 의미했다.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장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은 12개국의 집단 방어 체제인 나토 즉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창설해 소련을 견제했다.

50년 1월, 미국무장관 애치슨은 태평양에서의 미국 방위선을 발표했다. 이것은 국제적으로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알류산열도와 필리핀을 잇는 방위선 안에 한반도와 대만이 제외된 것이었다.

[인터뷰] "에치슨은 그런 식으로 분명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남한을 태평양 방위선에서 배제했습니다. 방위선 밖의 지역은 처음에는 자주 국방에 의존해야 하지만 마지막에 유엔에 의존할 수 있다고 연설에서 밝혔습니다. 물론 유엔은 이와 관련하여 승인한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 때 연설이 스탈린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계산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에치슨 선언이 있은 지 10일 뒤, 스탈린은 한반도의 운명을 뒤바꿀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슈티코프를 통해 김일성에게 한 장의 극비 문서를 전달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이제 남한에 대해 하고자 하는 일의 준비를 철저히 할 것과

이 일과 관련해 언제든 상의할 수 있고

김일성을 도와줄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김일성을 돕겠다는 것은 무력통일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그 즈음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70회 생일 축하 겸 소련과의 관계 정립을 하기 위해서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있었다.

이 방문 기간동안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중.소 간의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상호 방위를 규정한 이 조약으로 소련과 중국 그리고 북한을 잇는 삼각 동맹체제가 형성됐다.

1950년 3월 김일성도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이 방문은 스탈린의 요청에 따라, 49년과는 달리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 방문에서 스탈린은 전쟁에 대해 최종 허가를 하게 된다. 

[인터뷰] "소련에는 그전까지 평화적인 방법에 동의했다면 4월에는 적극적으로 군사력을 보강하는데 지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스탈린은 이제는 남한을 해방시키는 것을 허락한다. 이를 위해 준비해야하고 군대와 군사력을 반드시 보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스탈린은 전쟁에 대해 허가는 했지만 최종 결정은 중국과 상의하라는 단서를 달았다. 

다음 달인 50년 5월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기 위해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한다. 전쟁 계획을 모르고 있던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전쟁에 동의한 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전문을 띄웠다. 스탈린은 국제정세가 변했기 때문에 전쟁을 허락했다고 했다.

이에 마오쩌둥도 김일성의 전쟁 계획에 동의한다고 했다.

[인터뷰] "(마오쩌둥이) 직접적으로 스탈린을 반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김일성은 소련의 지지 하에 이미 충분한 준비를 했으니 중국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당시 중국은 여전히 자신의 남쪽 통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직접 한국 전쟁을 지원하러 갈 필요는 없었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마오쩌둥은 1950년 5월에 김일성에게 동의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김일성이 제안하고 스탈린이 허가하고 마오쩌둥이 동의한 전쟁. 

전쟁은 이제 카운트다운만 남겨놓고 있었다.

북한은 남북 총선거를 제의하는 등 평화 공세를 취하면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49년 겨울부터 50년 봄까지 북한군은 각 사단별로 대규모 기동훈련을 실시했다.
북한에 남아 있던 소련의 군사 고문단은 전쟁경험이 풍부한 작전 고문단으로 전면 교체됐다.

[인터뷰] "49년도 말까지는 고문들도 훈련고문들이었어요. 인민군대를 훈련하는 훈련고문들이 왔다가 6.25가 터지기 4개월 전에 훈련고문들을 싹 보내고 작전고문이 왔어요. 이때까지는 교육 관계의 고문이지만 이 사람들을 보내고 1월부터는 전쟁을 지도하는 고문들 그 고문들이 아마 한 4-50명 왔지요."

인민군이 속속 38선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전쟁이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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