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은 총알은 없다

원고 2014.01.16 01:59 Posted by 오미크론2

노동 집약 산업, 소프트웨어 개발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프로그래머는 천재나 오타쿠, 혹은 그 중간 어디쯤으로 그려지곤 하는 반면 현실 세계에서는 열에 아홉이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이다. 이 지극히 평범한 회사원들 업무의 상당 부분은 소프트웨어 설계와 코딩인데 이 과정이 흡사 건축과 비슷하다. 무엇을 어떤 식으로 만들지에 대한 설계가 있고, 이를 프로그래밍 언어의 문법에 맞추어 하나하나 작성하여 붙이고 모아 쌓는 식으로 최종 결과물에 이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결과물을 소스 코드(source code)라고 부른다. PC나 스마트폰 같은 기계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작성되다 보니 그 분량이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경우가 많다. 아이폰의 인터넷 어플(Safari)로 예를 들자면 핵심 모듈을 이루는 소스 코드의 분량만 무려 400만 라인이 넘는다. 문서 출력하듯이 셈해보면 A4용지로 40만 페이지이다. 매 줄 각 단어가 허투루 쓰인 것 없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그 구조의 복잡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더 다양한 기능, 더 발전된 성능에 대한 요구는 늘어만 가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도 증가하지만 원래 이 동네가 복잡성을 타고난 지라 숨 돌리며 일할 여유가 없다. 개발 효율을 높이고자 온갖 시도들이 동원됨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야근이요 옵션은 휴일 근무이다. 지식 집약 산업일 것 같은 겉보기와 달리 은근히 이거, 노동 집약 산업이다.


Silver Bullet

원래 ‘은 총알(Silver Bullet)’은 묘책이나 특효약을 가리키는 관용어이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인 프레더릭 브룩스(Frederick Brooks)가 1987년 “은 총알은 없다(No Silver Bullet)”라는 에세이를 발표하면서 IT 업계에서는 제법 고전으로 취급받는 용어인데 이 글에서 브룩스는 소프트웨어의 개발 생산성을 단번에 해결해 줄 만한 은 총알 같은 기술이나 개발 방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소프트웨어의 복잡성에 대해 본질적으로 다룬 내용이라 이 지면에서 자세하게 풀어내는 것은 곤란하지만 결론만큼은 곱씹어 볼만하다. 즉, 원래가 그렇게 생겨먹은 일이니 괜히 만병통치약 같은 ‘한 방’을 기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살다 보면 난마같이 얽힌 고민을 마주할 때가 있다. 생각지도 못 했던 결정적 ‘한 방’이 어디로부턴가 날아와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주길 꿈꾸기도 한다.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매주 복권 가게를 찾는 사람들 상당수도 ‘한 방’에 대한 기대가 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에서는 혹 그런 면이 없을까?


신앙의 은 총알을 찾아서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내 신앙은 제자리라는 것을 문득 깨닫고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있다. 한때 다른 이들에게 신앙의 롤모델이라 인정받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저 하나 앞가림하기 급급한 사람도 있다. 처음 접한 말씀의 신세계에 홀딱 빠져 장성한 신앙을 격하게 흠모하는 사람도 있다. 신앙의 일취월장을 이루어 이들을 만족하게 할 은 총알은 과연 있을까? 나아가, 요셉 10배 부흥을 눈앞에 가져다줄 은 총알은 과연 존재할까?

2014년을 맞아 새로운 각오와 결단을 다짐한 ‘요셉 신앙 작정식’. 그 작정서에 올려진 항목들은 모두 알 만한 것들이었다. 예배와 말씀, 기도와 봉사 그리고 전도. 교회 좀 다녀본 사람 치고 모를 만한 아이템들이 아니다. 참 뻔하다. 그런데 신앙생활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 기본적인 것들을 어쩌면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쉼 없이 이어가는 여정이다. 하지만 폭풍 같은 격정의 은혜가 찾아왔을 때 이를 날려먹지 않고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힘은 기본기의 부단한 반복에서 비롯된다. 시련으로 인해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도 결국엔 오롯이 믿음을 지켜내는 힘도 여기에 근거한다. 작정했던 것들을 하루하루 점검하며 반성과 다짐을 반복하는 와중에 우리의 신앙은 단단해져간다. 파송의 소감을 이야기할 때 요셉에서의 지난날을 반추하며 목메어하는 선배들의 모습에서 켜켜이 쌓인 커다란 신앙의 공력을 본다. 당장의 실효를 거두는 은 총알이 없이도 요셉의 가지는 담을 넘어 무성해질 것을 느낀다.

새해도 벌써 보름을 넘겼다. 공연히 조급해지는 마음을 다잡고 지름길로 향하는 시선을 거두어 기본기에 충실한 하루하루를 맺어가자. 신앙에도, 은 총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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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진납세

원고 2013.08.03 05:21 Posted by 오미크론2

제목: 자진납세

해방 이후 근대화, 민주화가 너무 빨리 진행된 부작용이겠지만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는 퇴임 이후의 삶이 순탄치 않았던 사람이 여럿 된다. 실정(失政)의 책임을 지고 망명길에 오르거나, 내란 수괴 등의 죄목으로 퇴임 후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등의 불명예는 그나마 약과다. 재임 중 측근의 흉탄으로 비명에 가거나, 퇴임 이듬해에 가택 부근에서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거둔 경우까지 있다.


최근에 부쩍 매스컴에 등장하는 어느 전(前) 대통령도 이들 중 한 사람이다. 재임 기간 중 뇌물을 받아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약 2200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으나 16년이 지난 현재까지 1600억 원 이상이 미납된 상태라고 한다. 추징을 안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그 복잡한 정치적 속내까지는 알 수 없지만 시효가 거의 끝나갈 때마다 일부 재산을 압류하여 강제 처분하는 방식으로 추징 시효를 근근이 연장시켜왔던 차에 지난 6월, ‘공무원 범죄 몰수 특례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일명 ‘전OO 추징법’이라 불리는 이 개정안을 통해 추징 시효는 현행 3년에서 10년으로 연장되었고 추징 대상도 본인뿐만 아니라 제3자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검찰의 추징금 환수 작업은 가속이 붙었고 연희동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은 물론 자녀들이 소유한 회사와 자택에까지 압수수색이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발견된 고가 미술품 등의 재산은 압류되었고 조세피난처에 설립된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자금 흐름, 친인척 명의의 부동산 등도 조사 대상에 올랐다. 드러난 것이 이 정도이니 모르긴 몰라도 주변인 수십 명에게까지 확대된 자금 추적은 정치적으로 볼 때 시쳇말로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상황이라 하겠다.


불법으로 얻은 자금을 국고로 반납할 의무가 생겼고 이러한 선고 내용을 집행하는 것이라 한층 더 심해진 셈이지만 채무란 것은 이렇듯 원칙적으로 혹독하다. 오죽하면 ‘빚쟁이는 발을 뻗고 잠을 못 잔다’는 속담이 있겠으며 성경은 ‘빚진 자는 종(잠 22:7)’이라고까지 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의 기록은 그 강도 면에서 갑(甲)이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 은혜를 받았으니 보답해야 한다는 식의 얌전한 표현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절박함이 묻어난다. 역시 사도 바울이다.


수련회가 끝났다. 예배의 은혜가 예배자의 마음가짐에 (어느 정도는) 달려 있듯이 이번 수련회를 통해 받은 은혜의 분량도 서로 같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은혜의 절댓값을 강요받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 안의 양심이 옆구리 쿡쿡 찌르고 있음은 인정해야 하겠다. 우리에게, 갚아야 할, 은혜의 채무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게다가 평강제일교회 말씀 사역의 분기점을 이룬 구속사 시리즈가 발간되기 시작한 지 벌써 햇수로 7년째에 접어들었음은 새삼 긴장되는 대목이다. 나의 구속사도 7년째가 맞는가? 정말로?


가진 재능이 내세울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이 교회에서 받아 온 은혜가 곧 빚이라 어떤 식으로든 일할 수밖에 없다며 씩 웃던 요셉 어느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비유컨대 누구처럼 ‘내 전재산은 29만 원’이라고 강변하는 요셉도 있을 수 있다, 처지가 다르고 형편이 다르니까 말이다. 마음은 있으나 그 여건에 들어맞는 사역의 장이 없다면 찾아보자. 찾아도 안 보인다면 조장이나 주위 임원들에게 요청하자, 내 상황이 이러저러한데 내가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있겠느냐고. 그런 자리를 찾고 만들어내는 것은 직분자들의 몫이다. 마침, 총회도 3주 앞으로 다가왔다. 임명장을 새로 나눠주는 것이 총회의 전부가 아닐진대 헌신의 자세를 일신(一新)하는 것도 총회를 맞이하는 요셉에게 요구되는 마음가짐이다. 핵심은 채무 변제를 향한 스스로의 의지이다.


자산으로 간주되는 세상의 채무(부채)와 달리, 은혜의 채무는 빨리 갚는 것이 상책이다. 받은 은혜에 상응하는 납세의 의무를 다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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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20111029: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원고 2011.10.27 14:27 Posted by 오미크론2

  흑묘백묘(黑猫白猫)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주도한 덩샤오핑의 주장으로 유명해진 말이지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고양이의 빛깔과 상관없이 쥐만 잘 잡으면 되듯이,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게 제일이라는 의미로서 1980년대 중국식 시장경제를 대표하는 용어입니다. 실제로 덩샤오핑의 이러한 개혁·개방정책은 중국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끌어냈고 지금의 중국은 미국에 이에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남쪽으로 오르든 북쪽으로 오르든 산 꼭대기에만 오르면 그만이듯, 검은 고양이냐 흰 고양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고양이의 역할이 쥐를 잡는 것이라면 가장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장땡이겠지요. 그 고양이의 비쥬얼이 깔끔한지 추레한지, 재산이 얼마인지 빚이 얼마인지는 부수적인 요소입니다. 윤리 선생님을 뽑는 것도 아니고 전쟁에 투입할 야전 사령관을 선출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비유컨대 고양이에 대한 평가는 그 고양이의 정책과 비전, 행정능력에 근거해야 할 것입니다. 배우자 고양이가 어떤지 부모 고양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따위는 아무리 고양이의 가치관 판단을 위한 참고용이라 해도 여성월간지 가십거리 기사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우리가 이러한 소위 ‘판단’을 하는 것도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기독인들이 세속의 제도에 따라 위임받은 역할 때문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 이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단순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중략)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중략)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롬 13:1-7)”
  요컨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니 통치하는 권세에 순종하라는 것, 벌 받는 것 때문이 아니라 양심 때문에라도 순종하라는 것, 두려워하고 존경하라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활동했던 초대교회의 시대 여건 즉 당시 로마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고려한 조심스러운 언급이라는 해석을 내놓을지 모르지만 그건 아닌 거 같습니다. 시대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면 그게 어디 말씀인가요.
  세상 권세에 대해 예수님이 내놓은 답은 꽤 쿨합니다. 책잡을 구실을 캐내려 예수님을 세속적 이해관계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옳다고 하든 그르다고 하든 이슈가 될 수 밖에 없는 교묘한 덫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교관의 한계를 드러내는 질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편승하거나 반목하거나 둘 중의 하나로 수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주어진 객관식 보기를 택하지 않고 예수님은 전혀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세속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뒤섞지 말라는 대답 앞에 머쓱해진 바리새인들의 벙찐 표정이 떠오릅니다.
  하늘을 바라보되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신앙인으로서 잠시간 가이사의 몫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젠 하나님의 몫을 위해 다시 전념해야 하겠습니다. 바빠서 그랬든 지쳐서 그랬던 우리가 잠시 한눈을 파는 그 순간에도 말씀은 끊임없이 뭔가 역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 주의 예배가 그렇고 크고 작은 모임, 행사들이 그렇지요. 당장 내일은 평강의 가게가 열립니다. 좋은 물건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들어와야 할 텐데, 비가 온다거나 너무 춥다거나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준비하고 진행하고 뒷정리하는 요셉들이 많아야 할 텐데, 수익금의 규모와 무관하게 모두가 즐기고 감사하는 자리가 되어야 할 텐데 등등 걱정이 많습니다. 어느 것 하나 소수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믿고 맡기는 거죠. 가이사의 일이든 하나님의 일이든 믿고 맡긴 후 그 결과에 순복하고 감사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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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20110619: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원고 2011.06.17 04:59 Posted by 오미크론2
 

  큰 아이의 주일학교 선생님은 매주 성경읽기 체크를 한다. 다섯 살배기 아이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어올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부모들이 옆에서 읽어주라 권하는 것이다. 성경이 재미있어서 라기 보다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또 듣고 싶은 마음에 아들 녀석은 잠자리에 들 무렵 성경을 읽어달라고 조른다. 그 참에 나도 잠시나마 경건모드로 전환한다.

  시편, 잠언은 읽기에 편하고 이해도 잘된다. 하지만 듣기 좋은 말도 삼세번이라고, 장이 넘어갈수록 잔소리 비슷하게 들리는 게 집중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역사서였다. 아들 또래가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울 듯 하지만 역사서는 그 오밀조밀한 스토리 자체가 큰 매력이다. 열왕기서 초반에 기록된 다윗 왕의 유언은 다시 봐도 뒤끝작렬 포스가 넘친다.

  사사시대에서 왕정으로 넘어가는 장면을 묘사한 사무엘서부터 읽어주기 시작했는데 몇 장 넘어가지 않아 중간중간 멈칫하게 된다. 사람을 죽이고 목을 벤다는 둥 손발을 절단하여 매단다는 둥 배를 찌르니 창자가 땅에 흐른다는 둥, 전쟁과 전투는 왜 그리 많고 그 묘사가 어쩌면 그렇게 디테일한 지 이걸 그대로 읽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여지는 것이다. ‘19금'까지는 아니어도 ‘12금’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게 아닐지.

  아무리 표현을 절제해도 전쟁의 묘사는 단지 몇 단어만으로도 참혹함을 드러낸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절망감과 공포가 대중을 지배한다. 거기 인간성은 없으며 그 현장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모습을 감춘다. 시체라 부르기도 힘든 고깃덩이가 널브러지고 연약한 육신은 유린당한다. 죽지 않기 위해 죽여야 하는 야만이 이성을 침묵시킨다. 백만 명의 사상자와 천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든 한국전쟁도 마찬가지이다. 3년 동안 전국토가 한번 이상씩 전선이 되었던 그 때에 군인과 민간인의 운명은 서로 다르지 않았다.

  휴전협정 후 58년이 지났다. 철없는 꼬맹이일 때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어느덧 일흔을 바라보고 있다. 그 처참한 순간순간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할지 몰라도 기억은 생각보다 세월에 약하다. 고스란히 원래의 모습을 지키기엔 지나간 60여년의 격변이 너무 거칠다. 흩어지고 색바랜 기억의 조각들은 커다란 이미지로 모여들고 그 이미지에 의해 기억의 세부 내용들이 재정의되고 단순화된다. 하물며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이 학습해온 ‘한국전쟁'의 의미는 더더욱 명료하다. 광기로 무장한 북한 괴뢰군이 선량한 대한민국을 침탈하려는 시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전쟁은, 그리고 전쟁을 통해 서로 맞부딪친 세력은 선 혹은 악으로 무 잘라내듯 심플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태평양 전쟁의 종식,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한 한반도 분할 점령,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대한 지지의 차이로 표면화된 좌우익 간 대립, 남과 북 각자의 정부 수립, 미국 소련의 군대 철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그리고 서로 다른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벌어진 38선 부근의 크고 작은 전투, 냉전, 애치슨 선언, 북한의 치밀한 계획, 소련의 허가, 중국의 동의, … 이 모든 것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전쟁으로 이어졌다. 배경이 복잡한 만큼 한국전쟁에 휘말린 당시 사람들의 심정 또한 단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희생의 순수성이 어떠했든 간에 선열들의 아픔과 눈물 위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늘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워레인저에 열광할 또래들에게 국방색 옷을 입히고 태극기를 흔들게 하는 것만이 나라사랑의 길은 아닐 것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 말씀하시지만 그런 전쟁조차 일어나지 않기를 소원한다. 두 번 다시 이 땅 위에 60여 년 전과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기를, 우리가 싸울 전쟁은 오직 신령한 전쟁만이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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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후아유 (Death At A Funeral, 2007) 중에서

원고 2011.02.21 01:54 Posted by 오미크론2
아버지는 특별한 분이셨어요
완벽하시진 않았을지 모르지만
좋은 분이셨어요
우릴 사랑하셨구요
제가 오늘 하려고 했던 것은
품위있게 보내드리려는 것 뿐이었어요
그게 과욕인가요?
그리고
아마도
하고 싶으신 일도 있었겠지요
인생은 단순하지 않아요 아주 복잡하죠
우리 모두 던져졌을 뿐이에요
무질서와 혼돈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요
의문 투성이지만 답은 없는 세상이죠
항상 죽음이 곁에 따라다니는 ...
최선을 다할 뿐이지만  
항상 최선을 다할 순 없죠
아버진 최선을 다하셨어요
항상 제게 말씀하셨어요
"네 인생에서 하고픈 일을 해라
얼마나 이 세상에 있게될지 모르니까
또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중요한 것은 도전했다는 사실이다"
부모는 항상 바른 길로 인도하죠
하지만 결국엔
혼자 해내야만 합니다
스스로 성숙해야만 되죠
여러분이 이곳을 떠나실 땐
제 아버지의 참모습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반듯하고 사랑스러운 분으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실 수 있으시면
또 아버지를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이 세상이 훨씬 좋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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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출석카드

원고 2011.02.11 00:24 Posted by 오미크론2

  새해부터 기독사관학교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남 못지않게 신앙생활을 꾸려나가는 여타 요셉들에게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겠지만 나름 동기가 절실했다. 메말라가다 못해 침잠의 끝까지 가라앉은 영성을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며 집사람이 내놓은 방안이었으니까. 언젠가부터 아이들 모시고(?) 주일 2부 예배드리는 것조차 힘겨워진 나한텐 이마저도 마뜩찮은 제안이었지만 그 딴 식으로 계속 살 거냐 라는 마음 한구석의 호령에 움찔하고 그러기로 했다.

  주일 2부예배후 타임과 주일 오후 4시 반 타임. 나와 집사람이 한 타임씩 나누어 듣되 한 사람이 수강할 때 다른 사람이 아이들을 맡는 조건이다. 한식과 기호식 달랑 두 가지만 나오는 회사 점심 메뉴조차도 고르기가 귀찮아 앞사람 따라가는 나로서는 두 타임 중 하나를 고르는 것에도 생각이 많았다. 당신이 좌하면 내가 우하고 당신이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며 어줍잖게 아브라함 흉내를 내다가 결국 난 주일 2부예배후를 택했다. 요셉선교회에서 토요일 오후 4시에 기독사관학교가 운영된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토요일에도 곧잘 출근이 요구되는 상황을 감안하면 그나마 최선의 선택이다.


  모리아와 사무엘의 주일 2부예배 끝 시각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몰라서 처음 몇 주 동안은 애를 좀 먹었는데 이내 익숙해지고 나니 모리아를 가득 매운 그 인파 속에서도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 형이 왜…' 나야 그렇다 치지만 이 시각에 여기보다 토요일에 요셉에서 사관학교를 수강할 법한 선배다. '참, 72또래지…' 사무엘 성전의 성가대석을 지키고 있는 여러 72또래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짠해왔던 참이다. 실제로 몇 주 안 남기도 했지만 파송은 이미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독사관학교를 수강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출석카드이다. 교통카드 비슷하게 생긴 것인데 뒷면에 내 이름이랑 학번, 전화번호 등이 찍혀 있다. 강의가 끝난 후 모리아를 나설 때 판독기에 갖다 대면 삐익 소리와 함께 판독기 램프가 빨강에서 녹색으로 바뀌면서 그 너머 노트북에 내 이름이 나타난다. 그것으로 사관학교 수강 여부가 기록되는 것이다. 모리아 1층을 가득 메운 인파가 각 출입구에 설치된 판독기 앞에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라면 장관이다. 강의 장소로는 그다지 좋은 여건이 아니기에 다음 주부터는 모리아 말고 다른 성전에서 모인다지만 이 출석카드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한다.

  격세지감이다. 14년 전엔가 솔로몬 성전(지금의 여호수아 성전 자리)에서 성경사관학교 강의를 들을 때에는 성전 문 앞을 지키고 서 계신 담당 전도사님에게 출석 카드를 내밀고 해당 날짜에 도장을 받는 방식이었다. 칸칸이 수놓아진 도장을 보며 내가 이만큼 꾸준히 자리를 지켰구나, 이때는 왜 빠졌지 라며 지난 시간을 복기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직업상 매일 스마트폰 소프트웨어와 씨름하는 와중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간극을 이렇게 체감하다니 새삼스러운 일이다.


  출석카드를 들고 판독기 앞에 줄을 서 있자니 문득 재밌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 카드가 매주 찍는 출석 카드가 아니라 생의 마지막을 저울질하는 관문을 통과하는 카드라면? 그리고 내 카드를 갖다 댔는데도 판독기 불빛이 바뀌지 않고 "등록이 안 된 카드입니다"라며 싸늘한 안내원 음성이 흘러나온다면? 그 너머 노트북에 내 이름 석 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노트북 앞에 앉은 주재자가 '누구냐, 넌?'이라는 시선으로 날 쳐다본다면?

  스치듯 떠오른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진다. 날씨도 많이 풀렸는데 공연히 옷깃을 여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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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기검진

원고 2010.11.12 03:37 Posted by 오미크론2

  "… 평균치보다 혈압이 쪼오금 높으시네요? 많이 높은 건 아니니깐 걱정할 정도는 아닌데요, 다만! 짠 음식, 기름진 음식 좀 피해주시면 되요. 간 기능은 정상인데… 아하! 지방간! 작년보다 좀 더 진행이 된 걸로 나왔어요. 이건 좀 주의하셔야 되요. 음식물 먹은 게 다 소비되지 않고 쌓이는 데 이게 간에 지금 붙어있는 거라 보시면 되거든요. 요거 나중에 간수치가 안 좋아지면 간경화로 갈수도 있고요, 비만까지 겹치면 당뇨, 고혈압, … 아~주 골치 아파질 수 있어요. 뭐, 별거 없어요. 음식물 줄이고 운동 많이 하고. 아시죠? 유산소운동. 가벼운 조깅, 속보, 수영, 등산, 자전거 타기! 줄넘기! 요런 거 꾸준히 해주시면 되요. 숨 야악간 찰 정도로 매일 30분씩. 알겠죠? 육류, 튀김요리, 내장요리, 새우! 오징어! 이런 거 피하시고 잡곡, 야채, 해조류 뭐 이런 거 주로 드시고. 물이랑 채소 빼곤 다~ 남는 영양소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시고,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는 거예요. 위염이 약간 있네요? 이거 작년에도 나왔던 건데…"

  다소 묵직한 톤의 남자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쉴새없이 쏟아진다. 운동 종류, 음식 종류 나열할 때는 리드미컬하게 박자까지 타는 거 같다. 이해는 간다. 건강검진 결과라는 게 천차만별일 리는 없고, 대충 비슷한 나이 또래면 비슷한 결과가 나올 테니, 앉아서 하루 종일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다보면 자연히 쫑알대는 것처럼 들릴 게다. 그렇지만 건강검진센터 상담 직원의 수다에 신경이 집중되고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건강에 대한 조언이니까.


  쪼그려 앉았다가 벌떡 일어나면 잠시동안 주변이 별천지처럼 반짝거린다. 눈 한쪽은 시력이 예전같지 않은 게 초점이 흐릿하다. 어깨랑 뒷목은 뻐근함을 달고 살고, 퇴근 길 막차 놓칠세라 계단 좀 뛰어오르면 그새 숨이 차오르고 무릎이 찌릿거린다. 하지만 그 뿐이다. 나타나는 '증상'들은 있지만 '왜' 그런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누가 일러주지 않는 한 알 도리가 없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안다고? 글쎄, 그건 요단강 건널 채비하고 '오늘 아니면 내일'하고 계신 어르신들 얘기다. 엊그제 멀쩡히 성가대에서 봉사하고 오늘 급성간염으로 병원 신세지는 게 우리다. 그만큼 모른다.


  건강검진이란 게 그렇다. 살 좀 빼야지 운동 좀 해야지, 평소엔 그저 아쉬운 소망 정도에 그치던 것들이 당장 아주 구체적인 목표로 정리된다. 지금의 내 몸이 어떤 상태이고 이대로 쭈욱 간다면 어떤 상태를 맞게 되는지 또렷한 그림을 그려준다. 위험한 사태를 막기 위해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극단적인 표현은 세련되게 피하면서도 또박또박 할 일을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 잘 안다 자부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그렇다고 뭐 딱히 남이 더 잘 아는 것도 아니다) 것은 건강만이 아니다. 일 년에 한 번, 신앙의 정기 검진이 있다면 참 좋겠다. 내 신앙에 뭐가 부족한지 딱 꼬집어 주고 뭘 어떻게 하면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그런 검진 말이다. 뭘 조심하고 뭘 피해야 하는지 조목조목 짚어주는 그런 안내 말이다.


  "… 평균치보다 찬양 지수가 쪼오금 떨어지네요? 많이 부족한 건 아니니깐 걱정할 정도는 아닌데요, 다만! 짜증내고 화내고 욱하고 뭐 이런 거 피해주시면서 짬짬이 흥얼흥얼 곡조 있는 기도, 아시죠? 구속사 이해 지수는 정상인데… 아하! 성경읽기! 작년 보다 좀더 떨어진 걸로 나왔어요. 이건 좀 주의하셔야 되요. 산수가 약한데 수학을 잘 할 수는 없잖아요? 요거 나중에 구속사 시리즈 계속 출간되면 아무리 읽어도 뭔 얘긴지 모르게 되면서 아~주 골치 아파질 수 있어요. 기도 지수 괜찮고, 어디 보자, 성도 간의 교제 지수도 그럭저럭 … 헌데! 아, 이게 친한 사람들 쪽에만 몰려 있네. 교회 새로 오신 분들도 부단히 챙겨주는 거, 이게 중요하거든요. 직장 쪽을 좀 볼까요? 음, "아무개 씨도 교회 다녀?"란 얘길 올해에만 열 번 이상 들으셨네요? 요거 좀 줄여주실 필요 있겠고요. 뭐, 별거 없어요. 교회에서 하던 것처럼 직장에서도 신실하려고 노력하고 성격 좀 죽이고! 겸손하고 화목하고! 동료들 온화하게 대하고! 뭐 그런 것들 꾸준히 해주시면 되거든요. 성도가 은혜를 끼쳐야죠, 주변에, 그죠? 그리고 보자… 헌금이나 십일조는 정확히 하셨네요. 그런데, 아하! 감사가 부족했어요. 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봉헌할 때 감사하는 마음은 챙겨주셔야 되죠. 봉사는, 어디 보자, 보름 전에 평강의 가게가 열렸는데 … 여기저기 빠릿빠릿하게 많이 일하셨어요. 요런 거 참 좋은데, 아! 초소 봉사는 좀 약하시네요, 그죠? 게다가 성전 청소, 주일 배식! 분리 수거! 평소에 봉사가 꾸준하게 이어지진 않았어요, 알고 계시죠? 이런 거 꾸준히 해주시는 게 공력에 차암 보탬이 되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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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0 칼럼 원고

원고 2010.07.08 11:22 Posted by 오미크론2

제목: 어떻게 기르오며 어떻게 행하오리이까


  주일 2부 예배 시간, 사무엘 성전 뒤편은 아이들 박람회장입니다. 다양한 개월 수, 생김새와 성격도 제각각인 영유아들이 예배에 집중하려는 엄마 아빠의 긴장을 잠시도 늦출 새 없게 만듭니다. ‘경건한 예배를 위해, 보채는 얼라들은 성전 밖에서 다스려 주십사’는 안내 자막이 뜨면 유난히 크게 들리던 어느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제서야 잦아듭니다. 성전 밖은 숫제 아이들의 놀이터입니다. 삼삼오오 모여 딱지를 치고, 공을 던져 받고, 비눗방울을 불어댑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머리가 띵해질 만큼 무더운 한낮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해맑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슬며시 미소가 피어납니다.


  반면, 세상은 참 험합니다. 연일 매스컴에서도 보이듯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력범죄는 끊이질 않습니다. 어느 다큐멘터리 자료에 따르면 2008년 한 해 동안 발생한 아동청소년 성폭력 범죄는 6,300여 건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이건 신고 건수요, 실제로는 더 많은 범죄가 있었겠지요. 우리가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오늘 하루 동안에도 이 땅의 어딘가에서 17명 이상의 아동들이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현실입니다. 그딴 놈들은 화학적 거세 따위의 자비로운 방법이 아니라 오장을 발라내고 사지를 토막 내어 서울광장 한복판에 효수해야 한다며 핏대를 세우시던 지하철의 어느 어르신 모습이 떠오릅니다.

  몇 주 전엔가, 예배 시간에 찡찡거리는 둘째를 재우려 성전 밖으로 나갔더랬습니다. 퀵보드를 타고 돌아다니는 안면 익은 아이들과 몇 마디 얘길 나누다가 “모르는 어떤 삼촌이, ‘아빠 친구인데 아빠가 너 데려오래’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라고 물어봤었지요. 문자 그대로 ‘뭘 어쩌란 말이냐’라는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을 상대로 일장 연설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성도를 눈동자처럼 지키신다는 말씀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가끔은 혹 방임을 덮어두기 위한 자위는 아니었는지 반성해봅니다. 전적인 신뢰의 출발점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아닐까요.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부모의 심경에 참 많은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아내/남편과의 결속과는 또 다른 성격의 강한 결속이 생깁니다. 회사 게시판에 [펌글]이라는 머리글로 올라온 부모 자식 간 감동스토리라도 하나 읽고 나면 집에 있을 아이들 얼굴이 떠오르고 가슴 한가운데가 저릿하며 짠해오는 게 예전과는 참 다른 느낌입니다. 오죽하면 영화 '크로싱'을 보다가 급기야는 꺼이꺼이 울어버렸던 적도 있었네요. (가족의 약과 식량을 구하기 위해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와, 그를 찾아 나선 어린 아들의 안타까운 엇갈림을 그린 영화입니다. 자식 때문에 속 썩을 때 보시면 즉효입니다)


  자녀를 통해 부모의 어두운 면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내 부모님의 이런 모습만은 내 자녀에게 보이지 않으리라 꼭꼭 다짐했던 그 무언가를 어느 순간 내가 내 자녀에게 보이고 있음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패인 나와 내 부모님 간의 감정의 골을, 내 자녀와 나 사이에서도 반복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됩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나 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녀는 부모를 닮아갑니다. 유전적인 요소도 분명히 있겠지만 가족이란 이름으로 함께 살면서 보고 듣는 데로 닮아가는 면이 더 클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따라하며 닮아가기까지 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부담이 아닙니다.

  죽지 않고 승천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의 아들 므두셀라가 태어난 시점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설교말씀처럼 마누라에 자식새끼 키우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좀 어려웠겠냐며 에녹의 독한 신앙을 되새길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에녹은 ‘자녀’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깨달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좀 과장하면 에녹은 자녀가 태어난 바로 그 때부터 개과천선한 셈입니다. 그런 뜻에서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라는 표현은 꽤나 적절합니다. 신앙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로또 같은 존재니까요.


  공부에도 왕도가 없듯이 육아에도 정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삼손이 태어나리라는 예언을 들은 그의 아비 마노아는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삿13:12)”라고 물었다죠. 우리도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자녀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길을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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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치 하나, 주름 둘

원고 2010.01.22 02:29 Posted by 오미크론2

  같은 또래 돌잔치에 갔을 때의 일이다. 마주앉아 식사하던 선배가 문득 내 머리를 보더니 웬 새치가 그리 많아졌냐며 새삼스레 놀라했다. 교회에서 오가며 20년 가까이를 알고 지내서 그런지 상대방의 모습에서 시간의 흔적을 쉽게 못 잡아내는 건 나만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우리가 벌써 …" 그 뒤로 세월 헤아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내 눈엔 암만 봐도 그 나이로 보이지 않는 얼굴인데도, 요즘 눈가에 주름이 장난 아니라며 엄살을 부리는 그 선배에게 옆자리 동기가 씨익 웃으며 한 마디 던진다. "받아들이셔야죠, 누나!"

  따지고 보면 그렇다. 아니라고 못할 걸 뻔히 알지만 순순히 받아들이기엔 어딘가 좀 억울한 것들이 종종 있다. 회사 일에 쫓겨 연달아 며칠 철야라도 했다 치면 영 맥을 못 추는 저질 체력이 그렇고, 앉은 자리에서만 일하는 사무직이라서 별수 없다는 변명으로 감추기엔 너무 넉넉해진 뱃살이 그렇다. 애들 낳아 키우랴 가족들 돌보랴 정작 자신에겐 소홀한 통에 한창 때의 미모는 앨범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된 아줌마의 모습은 또 어떤가. 빡빡한 일상에 나도 모르게 까칠해진 성질머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 뿐이랴. 뜯어진 달력 너머로 지나가버린 세월의 흐름은, 받아들이기 전에 놀라움이 앞선다. "어느새 벌써 이렇게 …"
  다음 주로 파송을 앞둔 선배들을 떠올리며 내 나이를 계산해본다. 요셉에서의 남은 시간이 촉박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여유만만 할 정도도 아니다. 며칠 전 퇴근길에 우연히 만났던 남선교회 2년차 정 아무개 선배의 말처럼 어어 하는 새에 훅 지나갈 지도 모를 일이다.

  삼십 몇 년 동안 해놓은 게 과연 무엇인가, 약간 오바스런(?) 고민에 잠긴다. 약해질 때 기댈 만한 신앙의 족적을 남겼는가, 선물로 받은 자식들이 귀감 삼을 공력을 쌓았는가. 아니, 좀 더 직설적으로 셈해보자. 여태껏 살아오면서 몇 명이나 말씀 앞으로 전도했던가. 성경은 얼마나, 구속사 시리즈는 몇 번이나 읽어봤는가. 얼마나 자주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했던가. 성전 청소든 초소든 행사준비든 헌신봉사에 힘을 보탰는가. 직분자로 부르신 손을 맞잡았던 것에 쪽팔리지 않을 만큼 사력을 다해 충성했던가. 영적으로 자신이 없다면 혹 바깥세상에서 보란 듯이 출세라도 했던가. 블레셋 속의 이삭처럼(창26:12), 애굽 속의 요셉처럼(창41:41) 말이다. 다소 과장된 바도 없지 않지만 그것으로 위로 받기엔 삼십 몇 년의 무게가 녹록치 않다.

  어느 블로그에서 읽었던 글귀로 기억한다. 나이는 '먹기'도 하고 '들기'도 한다고. 나이를 먹을 때는 그 주체가 자기 자신이지만 나이가 들 때는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제 순리대로 드는 것이라고. 나이를 먹는 것을 성장이라 한다면, 나이가 드는 것은 늙어가는 것이라고. 그래서 나이 먹고 싶어 하면 아이이고, 나이 드는 것이 싫어지면 어른이라고. 신입으로 입사한 새까만 후배 직원의 나이를 물어 보며 "참 좋-을 때다!" 하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확실한 어른인 것 같다.
 
  지난날을 추억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 모습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지난날을 지난날로 인정해야 한다. 보람찬 삶이었든 아쉬움이 묻어나는 삶이었든 다시 돌이갈 수 없는 과거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몇 년 전의 자기 모습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시쳇말로) 나잇값 하나 제대로 못한다면 그건 미련이고 집착이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그 나이에 걸맞은 모습과 행동, 수준을 찾아나간다면 미래의 내가 자랑스러워할 '생애 가장 찬란한 시기'는 바로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매해 다짐했었건만 올해의 첫 달도 달랑 한 주 남기고 유야무야 날아가 버렸다.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눈을 부릅뜨자. 머리에 새치 하나, 눈가에 주름 둘, 세월의 자취를 받아들이고 그 흔적에 민망하지 않은 신령한 내공을 길러보자. 그것이 우리에게 시간을 선물하신 분에게 부끄럽지 않은 길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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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6.7] 소통(疏通)을 위한 기도

원고 2009.09.14 19:57 Posted by 오미크론2
(평강제일교회 요셉선교회 주보 제582호 2009. 6. 7)

  대략 두 돌을 전후하여 아기들은 가장 원초적인 의사소통 수준의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한다. 물론 아직은 발음도 불완전하고 억양도 신통찮다. 제대로 못 알아먹는 내용도 태반이다. 부모조차도 알아듣지 못하는 통에 아기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다 제 풀에 지쳐 짜증을 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중에 가서야“아, 그거 말하는 거였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발음과 억양이 어지간히 자리를 잡은 후에도, 아이들과의 대화는 여전히 만만치가 않다. 어른 세대와 비교할 때, 주요 관심사가 다르고 판단의 기준과 문제 해결의 접근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의도를 옳게 헤아리는 소통(疏通)은 비단 아이와 어른 간의 문제만이 아니다. 다 큰 성인들 사이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고민거리다. 처한 형편이 다르고 우선적으로 챙겨야 할 이해관계가 다르면 상대방의 ‘아’는 내게 ‘어’로 들리고 나의 ‘오’는 상대방에게 ‘우’로 전달되기 쉽다. 하물며, 한 쪽은 말할 수 없는 상실감으로 감정적인 패닉에 빠져 있고, 다른 한 쪽은 지레 내린 판단에 따라 아예 귀를 틀어막고 있는 상황이라면 소통은 사실상 물 건너간 셈이다. 

  약 보름 전 토요일 아침, 대한민국 헌정 사상 초유의 사건이 터졌다. 전국 각지에 설치된 분향소를 다녀간 인원만 기백(幾百)만 명에 이르고 노제가 치러진 서울 광장은 노란 물결로 가득 찼다. 일주일의 장의 기간 동안 인터넷과 매스컴은 온통 이 사건에 대한 얘기로 넘쳐났으며, 일부 해외 언론에서도 제법 비중 있게 이를 다뤘다.


  솔직히, 이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않다. 재임 당시의 국정 사안 상당수가 즉각적인 호불호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들이었고, 그로 인해 국민들로부터 극과 극의 찬반을 불러 일으켰다. 임기 말에는 10%대의 참혹한 지지율을 기록했으며 최근까지 재기된‘도덕성 의혹’을 생각하면, 그를 마지막까지 지지했던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아름답지 않은 추억이 그렇게 많음에도 불구하고, 가히 신드롬이라 불릴 만큼의 국민적 애도가 쏟아진 것도 한편으론 이해할만 하다. 고인 앞에선 숙연해지기 마련이고, 다시 만날 수 없음에 대해 나쁜 기억보다 좋은 추억만을 생각하려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일지 모른다. 게다가, 정치인이긴 했으나 그 사람 됨됨이 자체는 결코 정치적이지 못했기에 스스로의 캐릭터를 죽음으로써 완성한 전직 대통령과 그간의 주변 상황을 떠올린다면, 애도의 마음을 갖는 데에 굳이 고인의 열렬한 지지자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 죽음은 그런 것일 수 없다. 치료를 요하는 정신적인 질환에 의해서가 아닌 바에야 그 이유가 무엇이든 절대자로부터 주어진 생을 자기 손으로 마감하는 것은 동정받기 어렵다. 삶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결한 의무이다. 하나의 생명이 내포하는 가치는 어떠한 정신적, 이념적 가치보다도 우월하다.‘목적을 위해 죽음까지도 각오하는 ’태도와‘죽음 자체로 목적을 달성하는’태도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성경을 봐도 목숨을 내놓고 사역을 감당한 이들은 있을지언정(에스더가 그랬고 사도 바울이 그랬다) 제 생명을 목적과 맞바꾼 이들은 찾아볼 수 없다. 신앙이 없는 이에게 이런 교훈이 별 의미를 가질 수야 없겠지만 아버지의 준엄한 판단은 신앙이 있고 없고를 가리지 않는다.


  요컨대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죽음 자체의 동기와 배경이 아니요 그 죽음을 통해 드러난 국민적인 목소리일 것이다. 서민 이미지, 탈 권위와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던 모습들, 어쩌면 그것은 서거한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의 한 부분이라기보다, 현 위정자들에게서 보고자 원하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답답하고 지친 마음에 끝 모를 한숨을 몰아쉴 때 “아, 이거 말하는 거였지?”하면서 나의 진정을 보듬어주는 부모의 모습을 말이다.


  이래저래 후폭풍이 거세다. 검찰총장은 도의적 책임을 진다며 사표를 제출하였다.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여야를 가리지 않으며 대학교수들은 앞 다투어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한편 일부 보수층은 ‘체제수호에 자신이 없다면 물러나는 것도 결단’이라며 압박의 수위를 높인다.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가지고 지금도 서울 도심 곳곳에서는 전경과 시민들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돌아가는 모양새가 어지럽기 짝이 없다.


  어느 때보다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성도의 기도가 절실하다. 거대한 죽음 앞에 저마다 내고 있는 사회 각계각층의 목소리가 오해나 왜곡 없이 소통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겠다. 일개 교회의 장로가 아니라 한 나라를 이끄는 신령한 장로로서의 사명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끝까지 감당할 수 있도록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다. 어수선함 가운데에도 말씀의 끈을 놓지 않는 성도의 신앙을 위해 기도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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