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20110619: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원고 2011. 6. 17. 04:59 Posted by 오미크론2
 

  큰 아이의 주일학교 선생님은 매주 성경읽기 체크를 한다. 다섯 살배기 아이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어올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부모들이 옆에서 읽어주라 권하는 것이다. 성경이 재미있어서 라기 보다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또 듣고 싶은 마음에 아들 녀석은 잠자리에 들 무렵 성경을 읽어달라고 조른다. 그 참에 나도 잠시나마 경건모드로 전환한다.

  시편, 잠언은 읽기에 편하고 이해도 잘된다. 하지만 듣기 좋은 말도 삼세번이라고, 장이 넘어갈수록 잔소리 비슷하게 들리는 게 집중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역사서였다. 아들 또래가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울 듯 하지만 역사서는 그 오밀조밀한 스토리 자체가 큰 매력이다. 열왕기서 초반에 기록된 다윗 왕의 유언은 다시 봐도 뒤끝작렬 포스가 넘친다.

  사사시대에서 왕정으로 넘어가는 장면을 묘사한 사무엘서부터 읽어주기 시작했는데 몇 장 넘어가지 않아 중간중간 멈칫하게 된다. 사람을 죽이고 목을 벤다는 둥 손발을 절단하여 매단다는 둥 배를 찌르니 창자가 땅에 흐른다는 둥, 전쟁과 전투는 왜 그리 많고 그 묘사가 어쩌면 그렇게 디테일한 지 이걸 그대로 읽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여지는 것이다. ‘19금'까지는 아니어도 ‘12금’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게 아닐지.

  아무리 표현을 절제해도 전쟁의 묘사는 단지 몇 단어만으로도 참혹함을 드러낸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절망감과 공포가 대중을 지배한다. 거기 인간성은 없으며 그 현장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모습을 감춘다. 시체라 부르기도 힘든 고깃덩이가 널브러지고 연약한 육신은 유린당한다. 죽지 않기 위해 죽여야 하는 야만이 이성을 침묵시킨다. 백만 명의 사상자와 천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든 한국전쟁도 마찬가지이다. 3년 동안 전국토가 한번 이상씩 전선이 되었던 그 때에 군인과 민간인의 운명은 서로 다르지 않았다.

  휴전협정 후 58년이 지났다. 철없는 꼬맹이일 때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어느덧 일흔을 바라보고 있다. 그 처참한 순간순간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할지 몰라도 기억은 생각보다 세월에 약하다. 고스란히 원래의 모습을 지키기엔 지나간 60여년의 격변이 너무 거칠다. 흩어지고 색바랜 기억의 조각들은 커다란 이미지로 모여들고 그 이미지에 의해 기억의 세부 내용들이 재정의되고 단순화된다. 하물며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이 학습해온 ‘한국전쟁'의 의미는 더더욱 명료하다. 광기로 무장한 북한 괴뢰군이 선량한 대한민국을 침탈하려는 시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전쟁은, 그리고 전쟁을 통해 서로 맞부딪친 세력은 선 혹은 악으로 무 잘라내듯 심플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태평양 전쟁의 종식,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한 한반도 분할 점령,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대한 지지의 차이로 표면화된 좌우익 간 대립, 남과 북 각자의 정부 수립, 미국 소련의 군대 철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그리고 서로 다른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벌어진 38선 부근의 크고 작은 전투, 냉전, 애치슨 선언, 북한의 치밀한 계획, 소련의 허가, 중국의 동의, … 이 모든 것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전쟁으로 이어졌다. 배경이 복잡한 만큼 한국전쟁에 휘말린 당시 사람들의 심정 또한 단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희생의 순수성이 어떠했든 간에 선열들의 아픔과 눈물 위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늘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워레인저에 열광할 또래들에게 국방색 옷을 입히고 태극기를 흔들게 하는 것만이 나라사랑의 길은 아닐 것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 말씀하시지만 그런 전쟁조차 일어나지 않기를 소원한다. 두 번 다시 이 땅 위에 60여 년 전과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기를, 우리가 싸울 전쟁은 오직 신령한 전쟁만이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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