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710 칼럼 원고

원고 2010. 7. 8. 11:22 Posted by 오미크론2

제목: 어떻게 기르오며 어떻게 행하오리이까


  주일 2부 예배 시간, 사무엘 성전 뒤편은 아이들 박람회장입니다. 다양한 개월 수, 생김새와 성격도 제각각인 영유아들이 예배에 집중하려는 엄마 아빠의 긴장을 잠시도 늦출 새 없게 만듭니다. ‘경건한 예배를 위해, 보채는 얼라들은 성전 밖에서 다스려 주십사’는 안내 자막이 뜨면 유난히 크게 들리던 어느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제서야 잦아듭니다. 성전 밖은 숫제 아이들의 놀이터입니다. 삼삼오오 모여 딱지를 치고, 공을 던져 받고, 비눗방울을 불어댑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머리가 띵해질 만큼 무더운 한낮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해맑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슬며시 미소가 피어납니다.


  반면, 세상은 참 험합니다. 연일 매스컴에서도 보이듯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력범죄는 끊이질 않습니다. 어느 다큐멘터리 자료에 따르면 2008년 한 해 동안 발생한 아동청소년 성폭력 범죄는 6,300여 건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이건 신고 건수요, 실제로는 더 많은 범죄가 있었겠지요. 우리가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오늘 하루 동안에도 이 땅의 어딘가에서 17명 이상의 아동들이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현실입니다. 그딴 놈들은 화학적 거세 따위의 자비로운 방법이 아니라 오장을 발라내고 사지를 토막 내어 서울광장 한복판에 효수해야 한다며 핏대를 세우시던 지하철의 어느 어르신 모습이 떠오릅니다.

  몇 주 전엔가, 예배 시간에 찡찡거리는 둘째를 재우려 성전 밖으로 나갔더랬습니다. 퀵보드를 타고 돌아다니는 안면 익은 아이들과 몇 마디 얘길 나누다가 “모르는 어떤 삼촌이, ‘아빠 친구인데 아빠가 너 데려오래’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라고 물어봤었지요. 문자 그대로 ‘뭘 어쩌란 말이냐’라는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을 상대로 일장 연설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성도를 눈동자처럼 지키신다는 말씀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가끔은 혹 방임을 덮어두기 위한 자위는 아니었는지 반성해봅니다. 전적인 신뢰의 출발점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아닐까요.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부모의 심경에 참 많은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아내/남편과의 결속과는 또 다른 성격의 강한 결속이 생깁니다. 회사 게시판에 [펌글]이라는 머리글로 올라온 부모 자식 간 감동스토리라도 하나 읽고 나면 집에 있을 아이들 얼굴이 떠오르고 가슴 한가운데가 저릿하며 짠해오는 게 예전과는 참 다른 느낌입니다. 오죽하면 영화 '크로싱'을 보다가 급기야는 꺼이꺼이 울어버렸던 적도 있었네요. (가족의 약과 식량을 구하기 위해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와, 그를 찾아 나선 어린 아들의 안타까운 엇갈림을 그린 영화입니다. 자식 때문에 속 썩을 때 보시면 즉효입니다)


  자녀를 통해 부모의 어두운 면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내 부모님의 이런 모습만은 내 자녀에게 보이지 않으리라 꼭꼭 다짐했던 그 무언가를 어느 순간 내가 내 자녀에게 보이고 있음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패인 나와 내 부모님 간의 감정의 골을, 내 자녀와 나 사이에서도 반복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됩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나 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녀는 부모를 닮아갑니다. 유전적인 요소도 분명히 있겠지만 가족이란 이름으로 함께 살면서 보고 듣는 데로 닮아가는 면이 더 클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따라하며 닮아가기까지 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부담이 아닙니다.

  죽지 않고 승천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의 아들 므두셀라가 태어난 시점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설교말씀처럼 마누라에 자식새끼 키우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좀 어려웠겠냐며 에녹의 독한 신앙을 되새길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에녹은 ‘자녀’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깨달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좀 과장하면 에녹은 자녀가 태어난 바로 그 때부터 개과천선한 셈입니다. 그런 뜻에서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라는 표현은 꽤나 적절합니다. 신앙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로또 같은 존재니까요.


  공부에도 왕도가 없듯이 육아에도 정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삼손이 태어나리라는 예언을 들은 그의 아비 마노아는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삿13:12)”라고 물었다죠. 우리도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자녀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길을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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