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분단(상)

한국전쟁 2012.07.12 12:28 Posted by 오미크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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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이고 찬란한 것들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인간은 늘 그런 매혹적이고 찬란한 것들을 열망해 왔다.
20세기 초, 그 열망은 자본주의 미국으로 상징됐다.

비슷한 시기, 평등과 계급 해방을 기치로 내건 러시아 혁명이 성공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탄생.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전쟁의 서막이었다.

1차 대전 패전으로 고통받던 독일 국민은 히틀러의 등장에 환호했다.
민족의 우월성을 외치며 강력한 군국주의를 표방한 나치 독일은 또다시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아시아 역시 평화를 잃었다.
천황 중심의 군국주의 일본은 이미 한반도와 만주를 침략한 후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세력권을 확장하고 있었다.

주권을 빼앗긴 채 일제의 압제 아래 놓여있던 한반도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총을 들고 전장으로 끌려가 침략자 일본을 위해 총알받이가 되어 사라졌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 비행기가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 미군 기지를 향해 폭격을 퍼부었다. 2차대전에서 한발 물러나 있던 미국은 진주만 공격으로 인해 참전을 선언했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하던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로 겨우 전세를 역전시켰지만 일본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 무렵 나치 독일은 독.소 전쟁을 시작했다. 유럽 서부 전선에서 승승장구하던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것이다.
그러나 모스크바 함락에 실패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도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나치 독일의 동부전선은 급격히 무너졌고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서부 유럽 전선에도 큰 변화가 예고되었다.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으로 상륙한 것이다. 사상 최대 규모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승기를 잡은 연합군은 나치 독일을 압박하며 독일 본토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나치 지배 아래 있던 파리를 탈환했고 해방을 맞은 파리는 미국에 환호했다. 전쟁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노르망디에서부터 독일 본토를 향해 진격하던 미군과 스탈린그라드에서부터 나치 독일을 향해 반격하던 소련군이 베를린 근교 엘베 강에서 만났다.

[인터뷰]
“아주 기쁘고 따뜻하게 그들을 맞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영어를 몰랐고 미군도 러시아어를 몰랐죠. 서로 기뻐하며 몸짓과 얼굴표정으로 의사소통을 했죠. 그때 소련군은 군 식량이 있었고 미군과 함께 둘러앉아 보드카와 음식을 함께 마시며 승리를 위해 건배했죠"

나치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미국과 소련은 동맹이 되어 싸웠다.
베를린은 함락됐고 히틀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독일의 영토는 연합군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됐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질 무렵 영국의 처칠과 미국의 루즈벨트가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만났다. 2차 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은 스탈린이었다.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스탈린은 얄타 회담에서 독일의 분할 점령과 동유럽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를 보장받았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지속적으로 대일전 참전을 요청했다. 길어지는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미군의 피해가 막대해졌기 때문이다.

[인터뷰]
“미국은 2차 대전 동안 소련에 대해 강한 호의를 보였습니다. 스탈린은 2차 대전 내내 지속적으로 미국을 압박했습니다. 소련이 독일과 싸우는 동안 미국은 일을 충분히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보험이 필요했습니다.”

스탈린은 독일이 항복한 이후에 결정하겠다며 확답을 미뤘다. 그의 관심은 아직 유럽에 있었다.

독일의 항복으로 유럽의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태평양 전선은 참혹했다.

45년 6월,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했지만 일본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쉽게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미군의 피해는 커져갔다.

45년 7월 미국, 영국, 소련의 세 거두가 포츠담에 모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루즈벨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트루먼은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인물이었다. 

회담 직전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비밀 전문을 받을 수 있었던 트루먼은 소련의 도움없이 일본을 단독 점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은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끔찍한 고통은 오래도록 계속됐다.

일본에 원폭이 투하된 직후, 소련군이 대일전 참전을 선언했다. 소련으로서는 전투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실리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소련의 태평양 함대는 웅기, 나진에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인터뷰]
“조선 반도를 통치하던 나남사단, 일본군 나남사단. 무서운 사단이었습니다. 한반도를 통치하던 나남사단이 흰 기를 들고 투항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 때 내가 울었습니다. 너희 놈들도 우리 앞에 투항할 때가 있구나 하는 것을 내가 느끼고 상당히 참 감동했습니다.”

무서운 기세로 남하하던 소련군은 개전 6일 만에 이미 한반도 북부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

당시 미군은 아직 오키나와에 있었다. 한반도에서 천km나 떨어진 곳이다.

미군은 소련군이 한반도를 단독 점령할 것을 우려해 한반도 점령 계획 일부를 수정했다. 하지 중장의 24군단을 중화기 없이 경장비만 갖추게 하고 급히 한반도로 이동시켰다.

예상치 못한 소련의 참전과 빠른 남하 속도에 당황한 미국은 소련의 단독 점령을 막기 위해 분주해졌다.

[인터뷰]
“우리는 38선을 3성조정위원회에 제시했는데 위원회는 그 안을 채택했고 소련도 즉각 그 안을 수락했습니다.”

단지 두 점령군의 작전 지역을 구분하기 위한 선. 그것은 북위 38도 선이었다.

[인터뷰]
“1945년에 한국은 스탈린에게 어떠한 중요한 의미도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일본과 중국이 있었고 일본은 파괴하고 약화시켜야했던 나라였습니다.
스탈린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주에서부터 38선 지점까지 군대를 동원하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인터뷰]
“실수는 아시아에서 미래를 결정하는데 소련에게 동등한 지위를 준 것입니다.
특히 한국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소련은 단지 6일 동안 극동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스탈린이 한 일은 그게 다였지만 북한에 손을 뻗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독일처럼 38선에 의해 나라가 분리됐습니다.”

북위 38도선이라는 낯선 경계는 일반명령 1호에서 처음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일본군 대본영(大本營)은 미국의 지시대로 항복 절차와 방법을 명시해 각 지역에 있는 일본군에게 하달했다.
두 점령군을 위한 경계선. 38선은 이렇게 처음 한반도에 나타났다.

1945년 8월 15일.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1주일 만에 일왕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 

2차대전의 완전한 종말. 일본의 패망으로 군국주의의 망령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게 됐다.

한반도는 해방의 감격에 휩싸였다. 일본은 물러갔다. 다시 제 나라의 주인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토록 염원하던 자주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게 된 한반도는 희망과 희열로 넘쳐났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해방과 함께 분단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소련군은 한반도에 진주하자마자 도착 성명을 통해 자신들이 해방군임을 강조했다.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인터뷰]
“평양으로 전차와 탱크를 타고 진격했을 때 북한 사람들이 좌우로 길가에 늘어서서 우리가 전차와 탱크를 타고 입성하는 것을 환영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나중에 이러한 관심과 예절을 그 어느 곳에서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해방군에 대한 주민들의 환영은 뜨거웠다.

미군은 일본이 투항한 지 3주가 지나서야 한반도에 들어왔다. 하지 중장이 이끄는 24군단이 인천에 도착했다. 

미군 진주의 분위기는 소련군 진주 때와는 사뭇 달랐다. 어디까지나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한 군사작전일 뿐이었다. 미군은 진주할 때까지의 치안 유지를 일본 경찰에게 맡겼다.

사람들은 미군 역시 해방군으로 맞아들이며 환영했지만 조선인에 대한 미군의 태도는 엄격했다. 미군은 동맹군이자 점령군으로 비춰졌다.

38선 이남 주민들이 미군 진주 소식을 들은 것은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기 전, 서울 상공에 뿌려진 맥아더 포고문을 통해서였다. 한국인에 의한 어떠한 자치단체도 인정하지 않으며 명령을 위반하면 엄중히 처벌한다는 고압적인 내용이었다.

미군은 한반도에서 무장 해제시킨 일본군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했다. 한반도를 점령한 미군이 경계해야 할 대상은 이미 패전국 일본이 아니라 동시에 한반도에 주둔해 있는 소련군이었던 것이다.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 17방면군은 소련의 한반도 단독 점령 위협을 미군에게 과대 부각해서 보고했다. 이러한 왜곡된 정보는 미군의 초기 점령 정책에 영향을 끼쳤다.

[인터뷰]
“맥아더 장군은 매우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지금 읽어보면, 한국이 일본의 피해국이라기보다는 적국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이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국무부는 한국이 적국이 아니라 침략의 피해자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터의 군 관계자들은 한국을 적국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인들이 국제정서에 어두웠던 것 이상으로 미군은 한반도 사정에 무지했다. 미 군정은 모든 정보를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군에게 의지했다.

서울에 입성한 하지와 미군부는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와 마주 앉았다. 항복 조인식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조선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미군에게 이양하는 자리였다. 

조인 문서 5조에는 일본의 문무관 모두를 그 자리에 유임하기로 했다. 미군은 아직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이 어떤지를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일장기가 내려질 때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인은 여전히 미국과 소련 연합군을 해방군으로 믿었고 곧 머지 않아 한국인에 의한 정부가 세워지리라 생각했다.

해방 직후 가장 신속하게 대처한 정치세력은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였다. 건준은 전국에 백 마흔 다섯개 지부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조직화되어 있었다.

미군 진주 소식이 전해지자 여운형 주도의 건준은 정부로 인정받기 위해 인민공화국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해외 독립운동가의 명성을 안고 귀국한 이승만. 

그러나 귀국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육성]
"하지 장군은 그 익일(다음 날)에 떠나서 서울로 가고 나는 수 일 쉬어가지고 오면 좋겠다고 해서 저는 3일 쉬어서 어제 아침 동경을 떠나서 어제 오후에 서울에 와서 내렸습니다."

미국 내 일부 세력은 이승만의 귀국을 탐탁치 않아 하며 귀국을 방해했다. 이승만은 미국 정보부와 군부의 후원 하에 한국에 들어왔다.

[육성]
"한 마음 한 뜻으로 우리 조선의 완전 무결한 독립을 차지하는 것이 나의 제일 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기회는 전무한 기회요 또 후무할 것입니다."

미 군정은 처음 얼마 동안은 이승만과 협력하면서 그를 강력히 후원했다.

임시 정부 요인들의 귀국은 이승만 때보다 더 어려웠고 거의 수모에 가까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인터뷰]
“11월 5일에 중경을 떠나가지고 중국 비행기로 상해로 나왔어요. 상해에 나와서 18일간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미군정의 비행기가 와야 서울에 올 수 있거든요. ‘개인 자격으로 각서를 써라’ 임시정부 요인들은 ‘쓸 수 없다. 독립운동 하던 사람이 어떻게 개인 자격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 그냥 들어가야겠다’ 이래서 18일 동안 머물다가 각서를 쓰고 들어갔습니다.”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바치고 꿈에 그리던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미 군정은 임시정부를 정부로서 승인하지 않았다.

한반도 어디에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단지 지도 상의 선으로만 존재하는 38선이 실질적인 힘으로 한반도를 나누었다.

미군과 소련군이 마주하고 있는 38선 접경.

현장 군인들은 서로에게 우호적이었다. 유럽의 엘베강에서 그러했듯이 그들은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향해 함께 싸운 동맹이었다. 38선은 아직 긴장과 충돌의 선이 아니었다.

점령 초기, 소련군은 한국인에 의한 일부 자치 조직을 합법적으로 승인했고 이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소련 군정은 주민들과 친밀해지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함께 소련에 우호적인 정치 세력을 키우기 위한 작업도 진행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평남도지사 후루가와로부터 항복서명을 받아냈다. 그 후 소련군정은 평안남도 인민위원회에 행정권을 이양했다. 당시 북한의 대표적인 지도자는 민족주의자 조만식이었다.

[인터뷰]
“민주당을 구성을 해가지고 북한으로서는 아주 대표적인 우리나라의 지도자로서 추대가 됐던 사람이지요. 평안남도 인민 정치 위원회라고 하는 것이 구성이 되가지고 조만식 선생이 그 위원장으로 취임하게 됐어요.

그리고, 김일성이 입국했다.

[인터뷰]
“45년 9월 19일 그게 바로 8월 추석날입니다. 25군단 정치부에서 지시가 왔어요. 내일 아침에 김일성 일행이 태평양함대 운송함 부가초프호를 타고 원산에 도착한다. 아침 8시경에.
배에서 내리는데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지 오래거든요. 나는 그 사람이 상당히 나이도 많고 머리도 희고 웅장하고 정말 장군다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배에서 내리는 걸 봤습니다. 한 사람도 그런 사람이 없어요."

"제1부. 분단(하)"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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