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출석카드

원고 2011. 2. 11. 00:24 Posted by 오미크론2

  새해부터 기독사관학교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남 못지않게 신앙생활을 꾸려나가는 여타 요셉들에게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겠지만 나름 동기가 절실했다. 메말라가다 못해 침잠의 끝까지 가라앉은 영성을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며 집사람이 내놓은 방안이었으니까. 언젠가부터 아이들 모시고(?) 주일 2부 예배드리는 것조차 힘겨워진 나한텐 이마저도 마뜩찮은 제안이었지만 그 딴 식으로 계속 살 거냐 라는 마음 한구석의 호령에 움찔하고 그러기로 했다.

  주일 2부예배후 타임과 주일 오후 4시 반 타임. 나와 집사람이 한 타임씩 나누어 듣되 한 사람이 수강할 때 다른 사람이 아이들을 맡는 조건이다. 한식과 기호식 달랑 두 가지만 나오는 회사 점심 메뉴조차도 고르기가 귀찮아 앞사람 따라가는 나로서는 두 타임 중 하나를 고르는 것에도 생각이 많았다. 당신이 좌하면 내가 우하고 당신이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며 어줍잖게 아브라함 흉내를 내다가 결국 난 주일 2부예배후를 택했다. 요셉선교회에서 토요일 오후 4시에 기독사관학교가 운영된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토요일에도 곧잘 출근이 요구되는 상황을 감안하면 그나마 최선의 선택이다.


  모리아와 사무엘의 주일 2부예배 끝 시각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몰라서 처음 몇 주 동안은 애를 좀 먹었는데 이내 익숙해지고 나니 모리아를 가득 매운 그 인파 속에서도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 형이 왜…' 나야 그렇다 치지만 이 시각에 여기보다 토요일에 요셉에서 사관학교를 수강할 법한 선배다. '참, 72또래지…' 사무엘 성전의 성가대석을 지키고 있는 여러 72또래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짠해왔던 참이다. 실제로 몇 주 안 남기도 했지만 파송은 이미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독사관학교를 수강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출석카드이다. 교통카드 비슷하게 생긴 것인데 뒷면에 내 이름이랑 학번, 전화번호 등이 찍혀 있다. 강의가 끝난 후 모리아를 나설 때 판독기에 갖다 대면 삐익 소리와 함께 판독기 램프가 빨강에서 녹색으로 바뀌면서 그 너머 노트북에 내 이름이 나타난다. 그것으로 사관학교 수강 여부가 기록되는 것이다. 모리아 1층을 가득 메운 인파가 각 출입구에 설치된 판독기 앞에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라면 장관이다. 강의 장소로는 그다지 좋은 여건이 아니기에 다음 주부터는 모리아 말고 다른 성전에서 모인다지만 이 출석카드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한다.

  격세지감이다. 14년 전엔가 솔로몬 성전(지금의 여호수아 성전 자리)에서 성경사관학교 강의를 들을 때에는 성전 문 앞을 지키고 서 계신 담당 전도사님에게 출석 카드를 내밀고 해당 날짜에 도장을 받는 방식이었다. 칸칸이 수놓아진 도장을 보며 내가 이만큼 꾸준히 자리를 지켰구나, 이때는 왜 빠졌지 라며 지난 시간을 복기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직업상 매일 스마트폰 소프트웨어와 씨름하는 와중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간극을 이렇게 체감하다니 새삼스러운 일이다.


  출석카드를 들고 판독기 앞에 줄을 서 있자니 문득 재밌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 카드가 매주 찍는 출석 카드가 아니라 생의 마지막을 저울질하는 관문을 통과하는 카드라면? 그리고 내 카드를 갖다 댔는데도 판독기 불빛이 바뀌지 않고 "등록이 안 된 카드입니다"라며 싸늘한 안내원 음성이 흘러나온다면? 그 너머 노트북에 내 이름 석 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노트북 앞에 앉은 주재자가 '누구냐, 넌?'이라는 시선으로 날 쳐다본다면?

  스치듯 떠오른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진다. 날씨도 많이 풀렸는데 공연히 옷깃을 여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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