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21] 습관

원고 2009. 9. 14. 19:55 Posted by 오미크론2
(평강제일교회 요셉선교회 주보 제567호 2009. 2. 21)

  지금은 휴직중인 집사람이 회사에 다닐 적에 있었던 일이란다. 어느 날 나이 지긋한 거래처 사장님이 두툼한 미술사(美術史) 책을 한 권 선물했다나. 마침 그쪽 분야에도 적잖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터라 반가운 마음에 말하길, “취업하고 사회인이 되고 보니 일하는 분야 외에는 마음 두기가 쉽지 않아요. 학교에서 전공한 사람만큼 이런 분야에 능숙해지고 싶긴 한데 어째 욕심뿐이네요.”라고. 그런데 이 거래처 사장님 왈, “그렇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다. 지금 당장 전공자 수준만큼 되고 싶은 욕심만 접는다면, 그래서 한 10년을 바라보고 즐기는 마음으로 매일 조금씩 시간을 투자한다면 10년 후엔 웬만한 전공자 수준은 될 수 있다.”라고, “나도 그렇게 해왔는데 주변으로부터 ‘혹시 미술 전공하지 않았냐?’는 소릴 가끔 듣는다.”즐기는 마음으로 조금씩 시간을 투자하면 10년 후에는 전공한 사람만큼은 어지간히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열쇠는 바로 1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의 ‘반복’일 것이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논어 옹야 편의 내용 일부를 현대적으로 변형한 이 경구도 결국 같은 말이다. 일주일에 달랑 한 두 시간 할애하는 것을 두고‘즐긴다’는 표현을 갖다 붙이진 않을 게다. 연습이든 학습이든 접고 난 뒤에도 금방 또 하고 싶은 것이 즐기는 것이다. 하고 있자니 즐거워서 나도 모르게 계속 하게 되는 것이 즐기는 사람의 자세다. 즐기면 자꾸 하게 되고 반복은 어느 새 습관으로 이어진다. 10년의 시간을 내 편으로 삼는 방법은 바로 ‘습관’이다.  


  지금은 비록 세상을 등지셨지만 한때 내 신앙의 가장 큰 밑그림을 그려주신 어느 목회자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신앙도 일정 부분은 습관이라고.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성경공부에 참석하고, 새벽기도회로 모이는 것, 각자의 처소에서 기도를 하고, 성경을 읽는 이런 모든 행위들이 습관이라는 형태로 수렴된다는 것이다. 습관은 반복을 수반하고 반복은 숙달로 이어진다. 스스로를 지탱하는 신앙적인 논리가 싹틀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 토양 위에서 습관은 더욱 강화된다. 이른바 신앙적인 선순환이다. 사도 바울이 참아들 디모데에게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딤전 4:7)”고 당부했던 것도 연습을 통한 반복 효과를 기대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요셉선교회에 등록한 후 지난 1년 동안 (거의) 단 한주도 빠짐없이 세 아이를 이끌고 경기도 이천에서 이곳까지 와 주일을 성수하는 안 모, 윤 모 요셉 가정의 신앙적인 저력도 그 첫 발자국은 이렇게 시작된 게 아닐는지.


  욕심 부리지 않고 즐기는 마음으로 습관만 잘 잡아준다면 나도 수 년 후에는 신앙의 달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TV에 나오는 ‘생활의 달인’처럼 말이다. 아니, 아니다. 솔직히 달인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이제껏 받은 셀 수 없는 은혜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이면 족하다. 또래별 레이스 집계 결과라며 또래장이 문자를 보내줄 때, 내 이름 옆에만 아무 내용도 적혀 있지 않은 민망한 상황이나마 면하면 될 것 같다. 거기서부터 다시 출발하면 될 것 같다.


  언젠가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습관’이 생겨버린 스스로를 바라보며 참 나태해졌다는 반성을 넘어 이젠 ‘이거 무슨 병 아닌가?’하는 생각에 제법 심각해지기도 한다. 일상의 바다에 푸욱 잠겨있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라면 그 일상을 차고 일어나 경건을 향한 발걸음을 디뎌 나가는것도 다른 모양의 습관일 것이다. 요컨대 필요한 것은 모멘텀(momentum), 즉 현재의 추세를 다른 방향으로 돌릴‘결정적 계기’라 하겠다.


  둘러보면 내 주변엔 계기로 삼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이제 우리도 가정예배 좀 제대로 드리자고 쫑알대는 집사람의 신령한 바가지도 그렇고, 또래별 레이스에 동참하라고 회유와 협박, 공갈과 구슬림의 경계를 넘나드는 또래장의 권면도 역시 마찬가지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새벽예배가 있고, 요셉 동계 워크샵은 마침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구속사시리즈는 곧 3권과 4권이 출간된다고 한다.  


  열거하자니 얼굴만 달아오른다. 제일 쉬운 것부터 하나씩 하나씩 버릇삼고 습관으로 만들어 나가야겠다. 그리고 이 ‘습관 만들기’에 동참할 자원자를 모아야겠다… 어딜 보시나? 바로 당신 얘긴데! 

[2008.2.17] 40, 새로운 시작

원고 2009. 9. 14. 19:54 Posted by 오미크론2
(평강제일교회 요셉선교회 주보 제514호 2008. 2. 17)

  40은 참 특별한 숫자다.
  
  세상에 관영한 죄를 쓸어내기 위해 비가 쏟아졌던 기간도 40일이고, 모세가 자기 민족을 돌볼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도 그의 나이 40세 때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신앙의 연단을 받았던 기간은 40년이며, 십계명을 받기 위해 모세가 기도했던 기간과 공생애 시작 무렵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했던 기간도 각각 40일이다. 세상에서 나이 40을 불혹(不惑)이라 부르며 인생의 분수령으로 삼는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그리고 오늘, 파송예배를 통해 요셉선교회를 떠나는 선배들의 나이도 올해로 딱 마흔 줄을 헤아린다.  


  파송 혹은 졸업
  
  척박한 토양에 심겨진 요셉이라는 씨앗은 어느덧 '담을 넘는 가지'로 성장하였다. 오늘 파송을 맞은 여러 선배들의 기도와 땀, 눈물이 있었기 때문이라 해도 과찬은 아닐 것이다. 일단의 기관 활동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다음 기관으로 옮겨가는 단계에 이른 것은 축하받을 만한 경사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10년 이상을 몸담은 신앙의 터전이기에 성전 구석구석에까지 신앙의 이력이 아로새겨져 있을 법하다. 그 기억을 더듬을 때 감사와 아쉬움이 묻어나올 것 같다. 성전을 오가는 선배들의 시선에서 올해 들어 은근히 습기가 느껴졌던 것도 나름 이해가 간다.

  선배들의 파송을 바라보며 마음 한편이  짠하다. 좀 과장하자면 왠지 모를 위기의식 비슷한 것도 느껴진다. 저런 선배가 있어서 행복하다는 뿌듯함은 어느덧 이제 나도 저런 선배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바뀌어간다. 떠나는 선배 못지않게 어떤 후배들은 그 빈자리를 아쉬워하고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란 게 어찌 그리 간사하고, 시간은 어쩌면 그렇게 쏜살같은지. 헤어짐이 아쉽다며 붙잡은 손을 차마 놓지 못하는 것도 잠시일 뿐이다. 일상으로 돌아와 연속되는 분주함 속에 정신없이 지내다보면 어느새 또 1년이 지나고 우리는 다음 또래를 떠나보내는 시점을 맞게 될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평강제일 안에서 한 가족이 아닌가. 오늘 파송된 선배들을 다음 주 토요일에 여주기도원에서 만나게 될 지도 모르고, 구역예배를 통해서 혹은 대예배를 통해서 교회 이곳저곳에서 마주칠 게 뻔하다. 오늘의 파송이 학교나 직장에서의 이별과 사뭇 다른 의미를 갖는 이유다.
  "그때 그 선배, 정말 열심이었는데…. 요즘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이라면 이따금 떠오르는 선배 한 두 명은 있을 것이다. 교회 일에 헌신하던 선배, 약한 후배들을 신앙적으로 보듬어주던 선배. 하지만 아쉽게도 어느 샌가 사라져 버린 선배, 지금은 어디 사는지조차 행방이 묘연한 그런 선배 말이다.


  오늘의 파송이 값진 이유 중 하나이다. 요셉에서의 몇 년간 자신의 신앙이 약해지지 않도록 지켜주셨음은 선배들의 감사 제목이다. 빡빡한 삶 속에서 온갖 시련과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오늘까지 자리를 지켰음은 후배들이 우러러볼 대목이다. 내 나이 40에 이르렀을 때 과연 나는 저 자리에 설 수 있을까? 파송을 바라보는 우리 후배들의 화두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경구가 떠오른다.‘이제 나의 요셉선교회 생활도 1년 남았다.’며 신앙생활에 열과 성의를 다하는 어느 70또래의 조용한 다짐은 믿음직한 귀감이다.

  나이 40을 가리키는 불혹(不惑)의 사전적 의미는 우리의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

  30대 청장년의 시기, 우리의 정신을 빼앗고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일이 어디 좀 많은가.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뤄야 하고, 출산과 육아의 부담을 짊어지기 시작하며, 사회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닦아 놓아야 한다. 20대 때보다는 한층 안정되었지만 할 일은 더욱 많아지는 시기, 그래서 우선과 차선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짧은 소견에 근시안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쉬운 시기이다. 파송을 맞은 선배들에게 우리가 존경의 박수를 보내는 것은 그들이 이 크고 작은 험난한 신앙 전투에서 자신의 믿음과 가정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 영적으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마흔 줄에 들어섬과 함께 새로운 신앙의 도정을 떠나는 선배들의 신령한 무운(武運)을 감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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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18] 당신의 감사 제목은 무엇인가요?

원고 2009. 9. 14. 19:52 Posted by 오미크론2
(평강제일교회 요셉선교회 주보 제501호 2007. 11. 18)

  출근길, 지하철 플랫폼에 닿자마자 열차가 도착하는 덕분에 간신히 지각을 면하게 되었을 때, 급한 볼일로 화장실에 달려갔는데 마침 딱 한 칸의 빈자리가 나를 위해 남아 있을 때, 조원들에게 안부 문자 돌렸더니만 반갑다는 답문자가 날아올 때, 전 이렇게 읊조립니다. “가암~사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저 그렇게 자잘한 것에 감동 잘 받는 단순요셉입니다. 어쩌면 극소심한 성격 때문인지도 모르겠군요. 아무렴 어떻습니까?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 좋지 않나요?

  하지만, 어떠한 감사든지 모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만은 아닌가 봅니다. 성전에 올라온 바리새인은 이렇게 기도했다죠.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예수께선 이런 사람을 ‘자기는 의롭고 남을 멸시하는 자’라고 질타하십니다.

  나보다 잘난 사람과 비교하면 감사하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보다 부족한 사람과 비교해서 감사의 제목을 찾는 것도 옳지 못하단 거죠. 이제까지 해왔던 나의 감사들에도 본의 아니게 이런 비교의 자세가 이따금 있었음을 기억하고 반성합니다.

  즐겁고 기쁜 일, 다행스럽고 좋은 일에 감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습관만 받쳐주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감사가 정작 빛을 발하는 순간은 감사 못할 상황에서 감사하는 것일 겁니다.

  왕 외에 누구에게든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지리라는 조서를 보고도 다니엘은 늘 하던 대로 하루 세 번 기도하고 감사했다죠(단6:10). 사자들과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게 될 것을 뻔히 아는 마당에, 다니엘은 도대체 무엇을 감사했을까요? 사자굴에 들어가긴 하겠지만 거기서 당연히 구원받을 것을 내다보고 미리 감사한 게 아닐까 합니다. 마치,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기에 순순히 아브라함의 칼에 자기를 내맡긴 이삭처럼 말이죠.

  이쯤 되면 ‘배짱’ 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아니, 이런 걸 가리켜 ‘믿음’ 이라고 하나 봅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는 것을, 세상에선 주제넘은 성급함으로 치부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는‘감사’라는 김칫국이 떡을 부르곤 합니다.

  다니엘의 감사를 압도하는 또 하나의 감사는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3:17-18)”

  이해하기 쉽도록 요렇게 바꿔보면 어떨까요? “비록 내 월급은 무성치 못하며 다니는 직장은 비전이 없으며 벌이던 사업에선 수입이 없으며 통장에 잔고가 없으며 집안에 세간이 없을지라도…” 이 와중에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요? 인정합니다. 솔직히 전 자신 없습니다. 역시 선지자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그저 매년 돌아오는 절기인가보다 여기지 말고, 수중의 지폐 몇 장 빼어 습관적으로 봉투에 담아 헌금바구니에 넣지 말고, 나의 ‘감사 제목’ 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받은 복을 세어 보라는 찬송가 가사(489장)처럼 나만의 감사 제목을 찬찬히 셈해 봤으면 합니다. 그러는 중에 우러나오는 감사의 마음을 봉헌했으면 합니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당신의 감사 제목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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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9.2] 학력 위조 열풍

원고 2009. 9. 14. 19:42 Posted by 오미크론2
(평강제일교회 요셉선교회 주보 제490호 2007. 9. 2)

  동국대 교수 신 모씨, 명지대 교수 정 모씨, 주말 인기 TV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했던 건축디자이너 이 모씨, 동숭아트센터의 김 모씨, 개그맨 출신 영화감독 심 모씨, 연극인 윤 모씨, 그리고 엊그젠 인기 방송인 최 모씨까지… 유명인들의 위조된 학력을 드러내는 보도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이른 바‘공인(公人)’이라 불리는 이들의 감쪽같은 속임을 보고 있자니, 결혼을 앞두고 약혼자와 예비 장인에게 잘 보이려 학력을 위조했다가 벌금형을 선고 받은 어느 30대 남성의 얘기는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실력보다는 학력을 중시하는 학계, 예능계의 풍토를 이번 기회에 반성하자는 소리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그 잘나신 ‘공인’ 들에게 은근슬쩍 면죄부를 발급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 그만한 잔머리가 없어 자기 학력을 위조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최근에 불거진 학력 위조 사태의 본질은, 자신의 지난 이력(履歷)을 정직하게 내세우지 않고 이를 사실과 다르게 조작하여 정당하지 못한 이(利)를 취하려는 심보를 다스리지 못함이다. 날조된 이력의 반짝 효력은 정직한 이력의 아우라를 결코 이기지 못한다.

  이력의 고백 대상이 하나님이기에 원천적으로 위조가 불가능하기도 하겠지만, 꾸밈없는 신앙 이력의 당당하고 진솔한 고백이 얼마나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눈앞으로 다가온 죽음의 시한을 15년이나 연장시켰고(히스기야/왕하20:2-3), 무뎌질 대로 무뎌진 민족의 양심을 깨워 회개운동을 일으켰으며(에스라/스9:5-15), 전쟁의 판도를 뒤집어 나라를 구하기도 했다(여호사밧/대하20:5-12). 또한, 예언의 말씀을 깨닫는 지혜를 얻었고(다니엘/단9:3-19), 초대교회 최고의 사도를 탄생시키는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스데반/행7:2-53). 개인과 민족의 신앙 이력을 정확하게 깨닫고 가감 없이 고백했기에 가능했던 역사들이다.

  우리는 지난 주 정기총회를 열었다. 총회에 임하는 우리는 우리 각자와 요셉선교회의 신앙 이력을 얼마나 정확하게 깨닫고 있었는지 되짚어볼 일이다. ‘이제까지 내가 신앙생활 한 게 얼마고 봉사한 게 얼만데….’ 하는 마음에 슬쩍 여유 부리고 잠깐 쉬려는 생각은 없었는지, ‘나는 아직 믿음이 부족해서….’ 하는 마음에 충성과 헌신은 남의 일로 여기며 여전히 요셉의 객을 자처하지는 않았는지. 이러저러한 단면만을 보고서 ‘요셉선교회는 이렇다 저렇다.’ 일찌감치 한계를 긋고 마음속으로 짐짓 결론을 내려버리진 않았는지.

  세간의 학력 위조의 경우, ‘위조’ 임을 스스로가 잘 알기에 최소한의 양심과 용기만 있다면 금세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신앙 이력에 대한 이러한 착각은 몇 번 되뇌다 보면 어느 새 정말 그런 것처럼 세뇌되기 십상이다. 비록 고의성은 없다 해도 ‘사실과 다르게 왜곡된’ 신앙 이력 위에서 말씀의 역사가 온전히 일어나길 기대하는 것은 욕심이다.

  요셉선교회의 열네 번째 회기가 시작되었다. 시간의 연속적인 흐름 앞에 시작과 끝을 운운하는 것은 인간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일 테지만, 마지막을 향해 신앙을 경주하는 우리에게는 다시 한 번 심기일전의 각오를 새롭게 할 기회가 될 터이다. 직분을 맡았네 말았네 라는 피상적인 시각을 벗어나 자신의 지난 신앙 연조를 찬찬히 되돌아보자. 어차피 다 ‘살자’ 고 하는 신앙생활 아닌가. 신령한 경주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으니 나의 부족한 신앙의 틈을 부지런히 메우면서 열심히 달려보자. 그리하여 일 년 뒤, 그럴듯한 신앙의 이력 몇 줄을 내 신앙의 이력서에 추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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