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분단(상)

한국전쟁 2012.07.12 12:28 Posted by 오미크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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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적이고 찬란한 것들은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인간은 늘 그런 매혹적이고 찬란한 것들을 열망해 왔다.
20세기 초, 그 열망은 자본주의 미국으로 상징됐다.

비슷한 시기, 평등과 계급 해방을 기치로 내건 러시아 혁명이 성공했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탄생.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전쟁의 서막이었다.

1차 대전 패전으로 고통받던 독일 국민은 히틀러의 등장에 환호했다.
민족의 우월성을 외치며 강력한 군국주의를 표방한 나치 독일은 또다시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아시아 역시 평화를 잃었다.
천황 중심의 군국주의 일본은 이미 한반도와 만주를 침략한 후 동남아시아 지역까지 세력권을 확장하고 있었다.

주권을 빼앗긴 채 일제의 압제 아래 놓여있던 한반도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없었다.
수많은 조선인들이 총을 들고 전장으로 끌려가 침략자 일본을 위해 총알받이가 되어 사라졌다.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 비행기가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 미군 기지를 향해 폭격을 퍼부었다. 2차대전에서 한발 물러나 있던 미국은 진주만 공격으로 인해 참전을 선언했다.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미국과 일본의 전투는 매우 치열했다.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하던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의 승리로 겨우 전세를 역전시켰지만 일본은 오랫동안 끈질기게 저항했다.

그 무렵 나치 독일은 독.소 전쟁을 시작했다. 유럽 서부 전선에서 승승장구하던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것이다.
그러나 모스크바 함락에 실패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도 소련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나치 독일의 동부전선은 급격히 무너졌고 소련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서부 유럽 전선에도 큰 변화가 예고되었다.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안으로 상륙한 것이다. 사상 최대 규모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승기를 잡은 연합군은 나치 독일을 압박하며 독일 본토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나치 지배 아래 있던 파리를 탈환했고 해방을 맞은 파리는 미국에 환호했다. 전쟁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노르망디에서부터 독일 본토를 향해 진격하던 미군과 스탈린그라드에서부터 나치 독일을 향해 반격하던 소련군이 베를린 근교 엘베 강에서 만났다.

[인터뷰]
“아주 기쁘고 따뜻하게 그들을 맞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영어를 몰랐고 미군도 러시아어를 몰랐죠. 서로 기뻐하며 몸짓과 얼굴표정으로 의사소통을 했죠. 그때 소련군은 군 식량이 있었고 미군과 함께 둘러앉아 보드카와 음식을 함께 마시며 승리를 위해 건배했죠"

나치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미국과 소련은 동맹이 되어 싸웠다.
베를린은 함락됐고 히틀러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독일의 영토는 연합군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됐다. 

독일의 패색이 짙어질 무렵 영국의 처칠과 미국의 루즈벨트가 흑해 연안의 얄타에서 만났다. 2차 대전의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은 스탈린이었다.
유럽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한 스탈린은 얄타 회담에서 독일의 분할 점령과 동유럽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를 보장받았다.
루즈벨트는 스탈린에게 지속적으로 대일전 참전을 요청했다. 길어지는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미군의 피해가 막대해졌기 때문이다.

[인터뷰]
“미국은 2차 대전 동안 소련에 대해 강한 호의를 보였습니다. 스탈린은 2차 대전 내내 지속적으로 미국을 압박했습니다. 소련이 독일과 싸우는 동안 미국은 일을 충분히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보험이 필요했습니다.”

스탈린은 독일이 항복한 이후에 결정하겠다며 확답을 미뤘다. 그의 관심은 아직 유럽에 있었다.

독일의 항복으로 유럽의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태평양 전선은 참혹했다.

45년 6월, 미군이 오키나와를 점령했지만 일본은 끈질기게 저항했다.
쉽게 끝나지 않는 전쟁으로 미군의 피해는 커져갔다.

45년 7월 미국, 영국, 소련의 세 거두가 포츠담에 모여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루즈벨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인해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트루먼은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인물이었다. 

회담 직전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는 비밀 전문을 받을 수 있었던 트루먼은 소련의 도움없이 일본을 단독 점령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미군은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끔찍한 고통은 오래도록 계속됐다.

일본에 원폭이 투하된 직후, 소련군이 대일전 참전을 선언했다. 소련으로서는 전투의 피해를 최소화하면서도 실리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소련의 태평양 함대는 웅기, 나진에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인터뷰]
“조선 반도를 통치하던 나남사단, 일본군 나남사단. 무서운 사단이었습니다. 한반도를 통치하던 나남사단이 흰 기를 들고 투항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 때 내가 울었습니다. 너희 놈들도 우리 앞에 투항할 때가 있구나 하는 것을 내가 느끼고 상당히 참 감동했습니다.”

무서운 기세로 남하하던 소련군은 개전 6일 만에 이미 한반도 북부의 상당 부분을 점령했다.

당시 미군은 아직 오키나와에 있었다. 한반도에서 천km나 떨어진 곳이다.

미군은 소련군이 한반도를 단독 점령할 것을 우려해 한반도 점령 계획 일부를 수정했다. 하지 중장의 24군단을 중화기 없이 경장비만 갖추게 하고 급히 한반도로 이동시켰다.

예상치 못한 소련의 참전과 빠른 남하 속도에 당황한 미국은 소련의 단독 점령을 막기 위해 분주해졌다.

[인터뷰]
“우리는 38선을 3성조정위원회에 제시했는데 위원회는 그 안을 채택했고 소련도 즉각 그 안을 수락했습니다.”

단지 두 점령군의 작전 지역을 구분하기 위한 선. 그것은 북위 38도 선이었다.

[인터뷰]
“1945년에 한국은 스탈린에게 어떠한 중요한 의미도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일본과 중국이 있었고 일본은 파괴하고 약화시켜야했던 나라였습니다.
스탈린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만주에서부터 38선 지점까지 군대를 동원하기로 합의를 했습니다.”

[인터뷰]
“실수는 아시아에서 미래를 결정하는데 소련에게 동등한 지위를 준 것입니다.
특히 한국을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소련은 단지 6일 동안 극동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스탈린이 한 일은 그게 다였지만 북한에 손을 뻗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독일처럼 38선에 의해 나라가 분리됐습니다.”

북위 38도선이라는 낯선 경계는 일반명령 1호에서 처음 그 존재를 드러냈다.

일본군 대본영(大本營)은 미국의 지시대로 항복 절차와 방법을 명시해 각 지역에 있는 일본군에게 하달했다.
두 점령군을 위한 경계선. 38선은 이렇게 처음 한반도에 나타났다.

1945년 8월 15일.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1주일 만에 일왕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항복을 선언했다. 

2차대전의 완전한 종말. 일본의 패망으로 군국주의의 망령은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게 됐다.

한반도는 해방의 감격에 휩싸였다. 일본은 물러갔다. 다시 제 나라의 주인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토록 염원하던 자주 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게 된 한반도는 희망과 희열로 넘쳐났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해방과 함께 분단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소련군은 한반도에 진주하자마자 도착 성명을 통해 자신들이 해방군임을 강조했다.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인터뷰]
“평양으로 전차와 탱크를 타고 진격했을 때 북한 사람들이 좌우로 길가에 늘어서서 우리가 전차와 탱크를 타고 입성하는 것을 환영했습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습니다. 나중에 이러한 관심과 예절을 그 어느 곳에서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해방군에 대한 주민들의 환영은 뜨거웠다.

미군은 일본이 투항한 지 3주가 지나서야 한반도에 들어왔다. 하지 중장이 이끄는 24군단이 인천에 도착했다. 

미군 진주의 분위기는 소련군 진주 때와는 사뭇 달랐다. 어디까지나 일본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한 군사작전일 뿐이었다. 미군은 진주할 때까지의 치안 유지를 일본 경찰에게 맡겼다.

사람들은 미군 역시 해방군으로 맞아들이며 환영했지만 조선인에 대한 미군의 태도는 엄격했다. 미군은 동맹군이자 점령군으로 비춰졌다.

38선 이남 주민들이 미군 진주 소식을 들은 것은 미군이 서울에 입성하기 전, 서울 상공에 뿌려진 맥아더 포고문을 통해서였다. 한국인에 의한 어떠한 자치단체도 인정하지 않으며 명령을 위반하면 엄중히 처벌한다는 고압적인 내용이었다.

미군은 한반도에서 무장 해제시킨 일본군에 대해서 비교적 관대했다. 한반도를 점령한 미군이 경계해야 할 대상은 이미 패전국 일본이 아니라 동시에 한반도에 주둔해 있는 소련군이었던 것이다. 조선에 주둔했던 일본군 17방면군은 소련의 한반도 단독 점령 위협을 미군에게 과대 부각해서 보고했다. 이러한 왜곡된 정보는 미군의 초기 점령 정책에 영향을 끼쳤다.

[인터뷰]
“맥아더 장군은 매우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지금 읽어보면, 한국이 일본의 피해국이라기보다는 적국이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이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국무부는 한국이 적국이 아니라 침략의 피해자였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쟁터의 군 관계자들은 한국을 적국이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인들이 국제정서에 어두웠던 것 이상으로 미군은 한반도 사정에 무지했다. 미 군정은 모든 정보를 조선을 지배했던 일본군에게 의지했다.

서울에 입성한 하지와 미군부는 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와 마주 앉았다. 항복 조인식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조선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미군에게 이양하는 자리였다. 

조인 문서 5조에는 일본의 문무관 모두를 그 자리에 유임하기로 했다. 미군은 아직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이 어떤지를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일장기가 내려질 때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한국인은 여전히 미국과 소련 연합군을 해방군으로 믿었고 곧 머지 않아 한국인에 의한 정부가 세워지리라 생각했다.

해방 직후 가장 신속하게 대처한 정치세력은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였다. 건준은 전국에 백 마흔 다섯개 지부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조직화되어 있었다.

미군 진주 소식이 전해지자 여운형 주도의 건준은 정부로 인정받기 위해 인민공화국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해외 독립운동가의 명성을 안고 귀국한 이승만. 

그러나 귀국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육성]
"하지 장군은 그 익일(다음 날)에 떠나서 서울로 가고 나는 수 일 쉬어가지고 오면 좋겠다고 해서 저는 3일 쉬어서 어제 아침 동경을 떠나서 어제 오후에 서울에 와서 내렸습니다."

미국 내 일부 세력은 이승만의 귀국을 탐탁치 않아 하며 귀국을 방해했다. 이승만은 미국 정보부와 군부의 후원 하에 한국에 들어왔다.

[육성]
"한 마음 한 뜻으로 우리 조선의 완전 무결한 독립을 차지하는 것이 나의 제일 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기회는 전무한 기회요 또 후무할 것입니다."

미 군정은 처음 얼마 동안은 이승만과 협력하면서 그를 강력히 후원했다.

임시 정부 요인들의 귀국은 이승만 때보다 더 어려웠고 거의 수모에 가까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인터뷰]
“11월 5일에 중경을 떠나가지고 중국 비행기로 상해로 나왔어요. 상해에 나와서 18일간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미군정의 비행기가 와야 서울에 올 수 있거든요. ‘개인 자격으로 각서를 써라’ 임시정부 요인들은 ‘쓸 수 없다. 독립운동 하던 사람이 어떻게 개인 자격으로 들어갈 수 있느냐 그냥 들어가야겠다’ 이래서 18일 동안 머물다가 각서를 쓰고 들어갔습니다.”

평생을 조국 독립을 위해 바치고 꿈에 그리던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미 군정은 임시정부를 정부로서 승인하지 않았다.

한반도 어디에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단지 지도 상의 선으로만 존재하는 38선이 실질적인 힘으로 한반도를 나누었다.

미군과 소련군이 마주하고 있는 38선 접경.

현장 군인들은 서로에게 우호적이었다. 유럽의 엘베강에서 그러했듯이 그들은 일본이라는 공동의 적을 향해 함께 싸운 동맹이었다. 38선은 아직 긴장과 충돌의 선이 아니었다.

점령 초기, 소련군은 한국인에 의한 일부 자치 조직을 합법적으로 승인했고 이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소련 군정은 주민들과 친밀해지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와 함께 소련에 우호적인 정치 세력을 키우기 위한 작업도 진행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평남도지사 후루가와로부터 항복서명을 받아냈다. 그 후 소련군정은 평안남도 인민위원회에 행정권을 이양했다. 당시 북한의 대표적인 지도자는 민족주의자 조만식이었다.

[인터뷰]
“민주당을 구성을 해가지고 북한으로서는 아주 대표적인 우리나라의 지도자로서 추대가 됐던 사람이지요. 평안남도 인민 정치 위원회라고 하는 것이 구성이 되가지고 조만식 선생이 그 위원장으로 취임하게 됐어요.

그리고, 김일성이 입국했다.

[인터뷰]
“45년 9월 19일 그게 바로 8월 추석날입니다. 25군단 정치부에서 지시가 왔어요. 내일 아침에 김일성 일행이 태평양함대 운송함 부가초프호를 타고 원산에 도착한다. 아침 8시경에.
배에서 내리는데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지 오래거든요. 나는 그 사람이 상당히 나이도 많고 머리도 희고 웅장하고 정말 장군다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배에서 내리는 걸 봤습니다. 한 사람도 그런 사람이 없어요."

"제1부. 분단(하)"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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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전쟁의 시그널

한국전쟁 2012.05.15 20:29 Posted by 오미크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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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전쟁은 이미 그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48년 2월, 조선인민군이 창설됐다. 북한 정부가 공식 출범하기 7개월 전이었다. 

[음성] "조선 민족의 역사상 처음으로 인민 자신의 군대를 가지게 됩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학살과 탄압을 당하던 우리 조선 인민은 이제는 자신을 보위하는 당당한 인민군대의 자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38선 이남이 단독선거준비로 혼란스러웠을 때 3개의 보병사단을 기간으로 하는 2만 7천명의 군사조직을 완비한 것이다.

그 당시 북한은 정부의 역할을 하는 인민위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46년 2월에 조직된 임시 인민위원회는 11월 선거를 통해 대의원을 뽑았다. 

위원장으로는 김일성이 선출됐다. 북한 내 민족주의 계열의 지지를 받았던 조만식은 신탁통치안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소련에 의해 제거된 상태였다.

[인터뷰] "그(조만식)는 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완벽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훗날 저는 그가 조만식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그가 잠만 자는 늙은 노인이 아니라 매우 활기찬 사람이라는 것을 그의 언행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논쟁이 이어졌는데 우리는 한국의 장래에 대해 논쟁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조만식은 대체적으로 반동주의자였습니다. 비록 그가 평양인민위원회 의장이긴 했지만 그는 반인민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후 인민위원회를 통해 김일성은 북한의 소비에트화를 강력히 추구해 나갔다.

많은 지하자원과 수력발전소, 일제 강점기 때 남겨진 산업시설들, 여기에 토지개혁과 같은 사회주의 개혁을 과감하게 실시하면서 북한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해갔다. 

38선 이북 지역의 실질적인 정치책임자였던 스티코프는 당시의 경제상황을 세세한 부분까지 기록해놨다.

그의 메모에 따르면 1947년 북한은 석탄, 화학, 경공업, 발전소, 수확량, 어획량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목표량을 100% 이상 달성하고 있었다.

해방 1년여 만에 38선 이북은 이남과는 전혀 다른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47년 11월엔 헌법제정위원회가 구성되 북한 헌법의 기초 작업에 들어갔다.

조선인민군 창설, 공화국 헌법 기초 작업 등 북한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를 치밀하게 진행하고 있었다. 

남한 사회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실업율은 높았고 물가는 뛰어올랐다. 식량과 생필품은 부족했고 전력란까지 겹치면서 경제는 바닥을 치고 있었다.

UN의 남북한 총선거 제안에 대한 북한의 거부 이후, 남한만의 단독선거실시 여부를 놓고 남한 사회는 분열되었다.

[음성] " ... 국민대회를 일으켰다. 우리는 또다시 국가 민족의 흥망을 좌우하는 위기에 당면하자 가능한 지역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자는 이승만 박사의 주장에 따라 세계 여론에 호소했다."

남한만이라도 단독 선거로 정부를 수립하고 이후 점진적으로 통일을 하자는 이승만.

반면 김구는 남북한 통일 총선거를 주장했다.

중도 우파의 대표적인 인물 김규식 역시, 단독 선거는 분단이라며 김구와 뜻을 같이했다. 

남로당은 무력 투쟁으로 남한의 단독 선거를 반대했다. 

총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두고 제주도에서 대규모 소요 사태가 발생했다. 제주도는 4.3사건이라는 비극에 휘말리게 된다.

미 해군 함정이 섬을 봉쇄한 가운데 국방 경비대와 경찰이 동원됐다. 당시 미 군정은 제주도의 사태를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제주도는 해방 후부터 군정 경찰과 서북 청년단의 횡포, 그리고 육지 사람들에 대한 불만 등 다양한 사회 문제를 안고 있었다. 여기에 단독 선거 반대와 좌익의 개입 등 사태의 원인은 복잡했다. 

[인터뷰] "군대는 아니고 경찰이 말이야 그 때 몇 사람이 말을 타고 다녔는데 말이 어린 아이가 길가에 있는 것을 발로 밟아버리고 그랬어요. 그래서 항의를 하니까 항의한 사람들 다 잡아가고 그랬어.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이 일어서 버렸어요. 일어섰는데 말하자면 공산당이 지지했다고. 어느 정도 지지한 것은 사실입니다."

4.3 사건의 여파로 제주도에서는 국회선거를 제대로 치를 수 없었다. 

군경의 토벌 작전은 이듬해 봄까지 계속됐다. 진압 과정에서 좌익으로 몰린 양민들이 억울하게 희생되면서 제주도는 오랜 세월 고통의 섬으로 남았다.

선거를 1주일 앞두고 혼란은 절정에 달했다. 협박과 테러로 많은 사람들이 피살됐다.

하지만 선거 당일은 비교적 순조롭게 선거가 진행됐다. 유권자 80% 이상이 등록한 가운데 투표율은 95.5%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투표라는 행위를 통해 독립국가를 수립한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참여의식을 경험하고 있었다. 

총 백 아흔 여덞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된 가운데 보수적인 한민당 계가 약 80여석, 이승만 계가 60여석, 임정계가 쉰 일곱석을 차지했다.

[음성] "현 정부는 전국 완전한 한국 전체를 대표하는 중앙정부임을 이 또한 선포하는 바입니다."

남한이 한국을 대표하는 국가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국회는 다수당인 한민당의 지지속에 90%가 넘는 득표율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인터뷰] "그는 물론 나이가 많았어요. 그는 훌륭한 미소를 띠고 있었고 표정은 온화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드러운 표정은 가면이었어요. 그 가면 뒤에는 아주 강인하고 강건한 사나이의 모습이 숨어 있었죠. 물론 그는 그의 많은 생을 외국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고집쟁이였고 한국을 위해 최상의 것을 원했습니다. 그가 한국을 위해 최상이라고 하는 것이 항상 미국인들이 한국을 위해 최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일치되지 않는 점이 많았습니다."

48년 8월 15일 해방된 지 3년. 일제에 의해 주권을 상실한 지 38년 만에 대한민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그것은 민족의 절반이 제외된 남한만의 정부였다.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인민위원회가 통치하고 있던 북한 역시 공식적인 정부 수립에 나섰다.
지금까지 남북한이 함께 사용했던 태극기가 내려지고 인민공화국기가 올려졌다. 이제 남과 북은 각자의 깃발 아래 따로 서게 된 것이다. 

8월엔 남한의 좌익 세력 일부가 비밀리에 황해도 해주에 모였다.

해주에서는 남조선 대표자 회의를 열어 최고인민 회의의 남한 대표를 선출했다. 이것은 북한이 한반도 전체의 대표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남한 정부 수립 열흘 뒤 북한의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을 뽑기 위해 총선거가 실시됐다. 

제1차 최고 인민회의가 소집됐다(1948년 9월 2일). 내각 수상으로 인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이 선출된다.

[인터뷰] "(김일성은) 보촌보 전투를 통해서 조선 내에서 가장 유명한 리더였습니다. 김일성은 젊고 융통성이 있고 소련으로서는 조종을 할 수 있었고 (소련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 교육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48년 9월 9일 북한의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선포됐다.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이들 두 정부의 공식적인 수도는 모두 서울이었다. 똑같이 서울을 수도로 한 두개의 정부는 하나의 레일 위에서 마주보며 달리는 폭주기관차처럼 위험한 관계였다.

[인터뷰] "한반도 분열은 전쟁을 위한 필요는 아니지만 충분한 조건이었습니다. 또한 두 개의 완전히 다른 형태의 정부와 군대가 이어졌습니다. 전쟁이 났을 때 하지 장군 조차도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에게는 전혀 놀라운 게 아니라네. 한국은 아시아에서 항상 분쟁 지대라고 여겼다네>>라고 했습니다."

남한은 정부 수립 후, 곧바로 한미간의 행정 이양식이 이어졌다. 

3년 간의 미 군정의 시대도 끝이 났다. 이제 모든 것을 한국인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했다.

정부 수립에 맞춰 국군이 정식으로 발족했다. 국가 주권의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군대를 갖게 된 것이었다.하지만 대부분이 미국의 지원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군대였다.

국군의 모체는 1946년 1월 창설된 국방경비대였다. 당시 무장과 편제에 있어 군사 조직이라기 보다는 치안 예비조직에 가까왔다.

[인터뷰] "미국의 정책에 의해 창설된 경비대기 때문에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중립도 아니고 저희들은 오로지 국내의 치안만 담당하는 경비대로서 그 장비도 일본군이 쓰다가 던지고 간 38식 소총에다가  일본군들이 버리고 갔던 군복들을 저희들이 그대로 몇달동안은 착용을 하면서 지냈습니다."

국방경비대를 모집할 때의 전형은 신체 검사와 구두 시험 뿐이었다. 

지원자에 대한 사상 검토나 신상 조사는 하지 않았다. 미 군정의 탄압으로 차츰 활동영역이 좁아지고 있던 좌익 세력에겐 군대는 안전한 피난처였다.

[인터뷰] "자격 심사 그런 것도 그렇게 심하게 따지지 않았지. 미국아이들이란 건 지금도 그렇지만 자기는 민주주의 식으로만 생각하거든. 자기는 미국식으로. 그 한국의 실정에 대해서 잘 파악 못하고 그러니까 이제 좌익도 들어오고 전과자도 들어오고 그랬다니까."

이미 좌익이 불법화된 국가에서 이들은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 폭탄같은 존재였다. 

우려가 현실화된 것은 여수에서 였다. 제주 사태 진압을 명령받은 14연대 좌익군인들이 출발 직전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경제 악화와 부패한 경찰에 불만이 쌓였던 일부 주민들이 가담하면서 순천까지 반란의 불길이 번졌다. 수백명의 경찰과 공무원 우익으로 지목된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출범한 지 2개월 밖에 안되는 이승만 정부에게 여순 사건은 중대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승만은 정권의 사활을 걸고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남한 병력의 4분의 1이 동원됐다. 광주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여수와 순천 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인터뷰] "여수에 가니까 종고봉이라고 종고산, 거기까지 가니까 날이 어두워졌어요. 어두워졌는데 보니까 14연대 반란군들이 자동차를 타고 벌건 기 달아 가지고 왔다 갔다 합디다."

여수는 흡사 전쟁터와 같았다. 

반란과 진압의 혼란 속에 시가지는 지옥으로 변했다. 양민과 폭도의 구분이 모호한 상황 속에서 억울한 희생자들이 잇다랐다. 

[인터뷰] "서국민학교 교문에 들어서니까 거기 우익 측 사람들, 경찰관들 쫙 서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이를 지나가요 거기서 사람이 지나간 뒤에 그 사람들이 뒤에서 이렇게 가리키면 그 사람은 거기서 끌려가서 뒤쪽으로 가서 그냥 총살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때 손가락 총이라는 말이 유행을 했지요."

10월 27일 토벌군은 여수 전역을 탈환했다. 반란군과 그에 가담한 좌익 세력도 검거됐다.

미국의 입장에선 여순 사건이 이승만 정부가 스스로 존립할 수 있을지를 판단하는 시험대가 됐다.

[인터뷰] "이 사건이 조기에 진압된 결과 그 당시 이승만 대통령 정부의 위신이 크게 세워졌습니다. 남부의 산악지방과 제주도에 얼마간의 공산주의 게릴라가 출몰한 것 외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토벌군에 밀린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도주해 게릴라 전을 전개했다. 이 때부터 남로당은 본격적인 게릴라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큰 위협은 되지 못했다.

이듬 해 2월, 계엄이 해제되었고 반란 주모자들에 대한 처형도 진행됐다. 

반란은 진압됐다. 그러나 좌익에 대한 본격적인 응징은 그 때부터 시작됐다. 

전체 군인의 5%에 달하는 4천 7백여명의 군 내 좌익 세력이 숙청됐다. 이후 국가보안법 제정과 반공 사상 강화 등 여순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정권은 반공 정책을 강화해 나갔다.

북한 정부 수립에 발맞춰 소련군의 철수도 진행되고 있었다. 북한 정부가 수립된 지 불과 백일 만인 12월 말까지 철군을 끝낸 건 모스크바의 자신감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아직 남한에 남아 있는 미군에 대한 무언의 압력이었다.

[인터뷰] "소련 정부는 미국이 그들 군대를 한국에서 철수하는지 여부에 관계 없이 소련 군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군대를 철수함으로써 미국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것이며 모든 상황이 미국으로 하여금 군대를 철수시키도록 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남한 정부 수립 후 미군 역시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 내전이 마오쩌둥의 공산당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자 철군을 연기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소련까지 철군을 마무리한 상황에서 미국은 더 이상 철군을 미룰 수는 없었다.

[인터뷰] "당시 군부 입장은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하자는 입장이었고 나를 포함한 국무성의 입장은 철수 반대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트루먼 대통령은 원칙적으로는 우리와 동조하는 입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장군의 끈질긴 설득으로 트루먼 대통령은 결국 철수를 지시하게 되고 우리는 남한에 대한 침략의 위험성이 가중되리라 염려하여 철수에 극구 반대를 했던 것입니다."

48년 말부터 미군도 철수하기 시작했다. 38선의 경비는 남한군에게 맡겨졌다. 38선을 그은 장본인들은 떠나고 38선을 원치 않았던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기묘한 상황이 펼쳐졌다.

남북의 완충 역할을 했던 미소군을 대신해 남한과 북한의 군대가 38선에 마주섰다. 38선은 미국과 소련이 자로 긋듯 인위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형적인 특성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산과 강 위로 그어진 38선은 그 경계가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상대의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두 개의 군대가 마주서자 물리적 충돌이 시작됐다. 당시 충돌의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개성 송악산 전투였다. 송악산의 주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처음으로 연대급 병력이 투입됐다.

[인터뷰] "송악산에서 내려다보면 488고지가 있어요. 거기에 인민군이 제가 볼 때 한 일개소대 돼가지고 우리 그 송악산을 쳐다보고 말이죠 그 다음에 포사격을 하면 우리 개성시내까지 포탄을 뚫어 치는 그런 그 요충지더라고요 그래서 거기 피아 간에 굉장히 전투가 뭐 주간야간으로 이 뭐 수시로 있었어요."

개성에서 시작된 전투는 멀리 황해도 옹진까지 확대됐다. 지리적으로 남한과 떨어져 고립된 옹진 지구는 남북간의 충돌이 가장 빈번한 곳이었다. 남한은 옹진을 방어하기 위해 전투사령부까지 설치하고 연대급 병력을 투입했다. 서로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적대감이 깊어갔고 남과 북은 그 어느 쪽도 물러서거나 자제하지 않았다.

[인터뷰] "옹진에 도착해서 이틀 후에 국사봉 1고지, 2고지까지 점령했죠. 3고지는 점령을 못 했습니다. 인민군이 원래 숫자가 많더라고요. 6고지까지 점령하게 되면 인민군이 6km 후퇴해서 주둔하게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어떻게 해서라도 6고지를 점령해야 한다."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38선 경계를 넘나드는 경우도 있었다. 옹진 반도에서 북한군이 점령한 두락산은 이 남, 남한군이 차지한 국사봉은 이 북에 있었다. 

38선에선 1949년부터 일년 반 동안 무려 칠백 예순 건에 달하는 충돌이 벌어졌다. 이곳은 당시 세계적으로 격화된 냉전의 최전선이었고 이미 작은 전쟁은 시작됐다.

[인터뷰] "38선 충돌의 중요한 요인은 미군을 향한 시위 효과가 컸습니다. 군사 원조를 더 받아내려고 하고 미군 철수를 늦추려고 하는 그러나 반대로 김일성 쪽 북한 쪽에서 38선 충돌을 격화시킨 것은 남한의 체제를 흔들어 놓으려는 측면과 함께 동시에 스탈린, 소련을 향해서 항상 휴전선이 불안하고 이승만 정부가 이렇게 언제든지 북침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그런 측면이 컸습니다."

이 무렵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새로운 계획을 제안했다. 

그것은 옹진반도에 있는 한국군을 소멸시키고 그 지역을 점령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스탈린은 옹진과 해주의 점령이 자칫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해 공격을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남북한의 싸움은 38선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춘천 지역을 지키던 두 개 부대 대대장이 대대원들 일부와 가족을 이끌고 월북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북한은 대대적인 환영 행사를 통해 북한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했다.

49년 6월엔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이 결성됐다. 여기에서 내놓은 제안은 UN 한국 위원단이 한국에서 철수할 것과 통일의 전제 조건으로 이승만의 축출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에게 이승만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장애물이었다. 북한은 이승만 정부를 교란시키기 위해 강동 정치학교에서 양성한 게릴라들을 침투시킨다. 

남한을 뒤흔든 게릴라 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남쪽에서도 북한에 게릴라를 보냈다. 하지만 북한의 공고한 체제 때문에 대부분 실패했다.

1949년 여름, 침투 도중 발각된 호림 부대도 그 중의 하나였다. 북한은 공개 재판을 열어 남한의 침공을 대대적으로 선전한 뒤 이들을 처형했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암살됐다.

김구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뤄졌다. 이승만은 참석하지 않았다. 김구의 죽음으로 통일정부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도 사라졌다.

그 즈음 남한의 최대 현안은 미군 철수 문제였다.

[인터뷰] "이승만은 1949년 5월 31일 미군 철수를 저지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방법을 동원했는데 미국 대통령에게 직접 탄원서를 보내 미국의 철군 결정을 비난하기도 했고 한국 국회에서 결의문을 통과시켜서 미국에 철군에 대한 생각을 바꿀 것을 촉구하기도 합니다. 유엔에다가 영향력을 행사해줄 것을 탄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가두 시위를 통해서 한국 국민들이 미군 철군을 반대하는 것도 보여줬습니다."

1949년 6월 말, 남한 정부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긴 채 완전히 철수했다. 이로써 한반도에 미소군이 주둔하던 시대는 끝이 났다.

이제 남한은 모든 국가적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야 했다. 그러나 미국은 떠났지만 군 예산과 무기의 대부분은 여전히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이승만은 북진 통일을 주장했다. 일부 군지도부들도 이에 동조했다. 여기에는 미국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미국은 당시 남한 지도부의 북진 통일 움직임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승만의 바람과는 달리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지원이 위험한 일이라고 인식했다. 

[인터뷰] "사실은 미국의 군사원조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하지만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원조가 너무 많을 경우 이승만이 북진할지도 모른다는 미국 정부의 우려 때문이었습니다. 기억할지 모르지만, 처음부터 이승만의 구호는 북진 통일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미국 측에서는 이승만에게 공군병력 지원도 해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49년 3월 김일성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김일성은 1949년 신년사에서 국토 완전론을 주장했다. 이것은 북한을 혁명기지로 삼아 남한 지역의 혁명을 완수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북한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련의 허락과 지원이 있어야만 했다.

[자막] "정부간 회담차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대표단이 도착했다. 외무장관 그로미코 동지와 각료회의 부의장 미코얀 동지가 영접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무원 수석 김일성 동지가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정무원 부주석 겸 외무장관 박헌영 부주석 홍명희가 동행했다."

김일성은 스탈린과의 만남에서 경제 원조 등을 논의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한반도 통일 문제였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북한군이 강력하지 못하며 남한에는 아직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미국과의 협정을 깰 수 없다며 김일성의 전쟁 계획에 반대했다.

(자막: "북한군은 남한군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남한에는 아직 미군이 있다. 소련과 미국 사이에는 아직도 38선 분할협정이 유효하다.")

김일성의 반발에 스탈린은 남한이 공격해 온다면 이를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자막: "적들이 침략의도가 있다면 조만간 먼저 공격해 올 것이다. 그러면 절호의 반격 기회가 생긴다.")

[인터뷰] "김일성이 남한에서 좀 더 저항 세력을 더 넓혀가길 바랐던 것이었습니다. 남한국민이 선동되고 분열될 때 그때야 비로소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을 침투하고 이승만 정권을 뒤집을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 바로 스탈린의 생각이었습니다."

당장의 남침 동의는 얻지 못했지만 그 방문으로 김일성은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

바로 조.소 경제문화 협정을 체결한 것이다. 겉으로는 단순한 경제협정이었지만 그 안에는 군사 원조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음성]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 대표단은 우리에게 뜨거운 환영과 만족한 교섭 결과에 대하여 소련 정부와 스탈린 대원수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위대한 소련 인민과 조선 인민과의 영구불멸한 친선 만세 소련 인민의 위대한 수령이시며 조선 인민의 친근한 벗인 스탈린 대원수 만세"

김일성의 소련 방문 이후,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규모의 무기 지원이 이루어졌다.

[인터뷰] "소련배는 도착해 있어요. 거기 정박해 있어요. 무기를 인수하고 인양하는데 그 배의 보안 유지를 내가 책임지게 되었어요 거기 노동자들은 지방 당에서 지방 정치보위부에서 동원한 노동자들로 하여금 배에서 그게 8000톤급 배였어요. 거기에서 인양된 것이 그 당시 무전기, 대포, 사이드카 이런 것을 보통 한 열차가 열 한 열차인데 일주일 실어 올렸어요."

소련은 탱크와 대포, 대공포 그리고 전투용 항공기 등을 지원했다. 이로써 인민군은 공격군으로서의 화력을 갖춰 나가며 김일성의 계획에 날개를 달게 됐다. 

한편 중국의 상황은 극변하고 있었다. 미국의 지원 속에 장개석의 국민당이 승전하는 듯 했지만 전세는 역전되고 있었다.

미국의 개입을 우려한 스탈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은 양쯔강 도하작전을 감행해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했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위기에 몰렸고 마오쩌둥이 중국의 새 주인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내전 당시 국민당에게 쫒기던 공산군은 북한을 피난처로 삼고 물품을 제공받기도 했다. 승리가 공산당으로 기울 즈음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국공 내전에 참전한 한인들로 이루어진 부대를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49년 여름, 김일성의 요청으로 마침내 북한으로 넘어온 두 개의 한인 사단 2만명은 각각 인민군 6사단과 5사단이 됐다. 다음 해에도 한인 부대 한 개 사단이 추가로 도착했다.

병력은 증가했고 막강한 화력과 병력을 갖추며 북한군의 전투력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전투 경험이 많은 한인 부대는 북한군의 핵심 병력이 됐다.

[인터뷰] "김일성의 인민군의 군사 수를 늘리기 위함이었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부대들은 모두 전쟁 경험을 통해 단련이 되어 있었고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후에 한국전쟁 과정에 있어서 사실 핵심적인 주력군의 역할을 한 것은 조선족 부대였습니다."

1948년에서 49년으로 접어들면서 국제 사회는 냉전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다. 냉전의 가장 위험했던 대결의 하나가 11개월에 걸친 소련의 베를린 봉쇄였다.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미.소를 중심으로 두 개의 적대 진영으로 갈라졌다. 유럽에서 미.소 간의 긴장이 절정에 달한 곳은 독일이었다. 패전국이었던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각각 분할됐고 동독 안에 있던 베를린 역시 동서로 나뉘었다. 

48년, 소련은 서베를린을 잇는 모든 육로를 봉쇄했고 미국은 이에 맞서 베를린에 식량과 물자를 공수하기 시작했다. 소련은 11개월 만에 베를린 봉쇄를 풀었고 이어 독일 연방 공화국과 독일 민주 공화국이 세워졌다.

1949년 8월, 소련은 원폭실험에 성공하게 됐다. 이로써 미국의 핵무기 독점시대가 끝나고 냉전 시대의 판도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 모인 군중 앞에서 마오쩌둥은 새로운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했다. 소련과 함께 공산주의의 큰 축으로 떠오른 중국. 중국의 공산화는 아시아 뿐만 아니라 세계 질서의 재편을 의미했다.

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 확장은 미국의 대외정책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미국은 12개국의 집단 방어 체제인 나토 즉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창설해 소련을 견제했다.

50년 1월, 미국무장관 애치슨은 태평양에서의 미국 방위선을 발표했다. 이것은 국제적으로 커다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알류산열도와 필리핀을 잇는 방위선 안에 한반도와 대만이 제외된 것이었다.

[인터뷰] "에치슨은 그런 식으로 분명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남한을 태평양 방위선에서 배제했습니다. 방위선 밖의 지역은 처음에는 자주 국방에 의존해야 하지만 마지막에 유엔에 의존할 수 있다고 연설에서 밝혔습니다. 물론 유엔은 이와 관련하여 승인한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 때 연설이 스탈린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계산이 틀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에치슨 선언이 있은 지 10일 뒤, 스탈린은 한반도의 운명을 뒤바꿀 중대한 결심을 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북한 주재 소련 대사 슈티코프를 통해 김일성에게 한 장의 극비 문서를 전달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이제 남한에 대해 하고자 하는 일의 준비를 철저히 할 것과

이 일과 관련해 언제든 상의할 수 있고

김일성을 도와줄 용의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김일성을 돕겠다는 것은 무력통일에 동의한다는 뜻이었다.

그 즈음 마오쩌둥은 스탈린의 70회 생일 축하 겸 소련과의 관계 정립을 하기 위해서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있었다.

이 방문 기간동안 마오쩌둥은 스탈린과 중.소 간의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상호 방위를 규정한 이 조약으로 소련과 중국 그리고 북한을 잇는 삼각 동맹체제가 형성됐다.

1950년 3월 김일성도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이 방문은 스탈린의 요청에 따라, 49년과는 달리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 방문에서 스탈린은 전쟁에 대해 최종 허가를 하게 된다. 

[인터뷰] "소련에는 그전까지 평화적인 방법에 동의했다면 4월에는 적극적으로 군사력을 보강하는데 지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스탈린은 이제는 남한을 해방시키는 것을 허락한다. 이를 위해 준비해야하고 군대와 군사력을 반드시 보강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스탈린은 전쟁에 대해 허가는 했지만 최종 결정은 중국과 상의하라는 단서를 달았다. 

다음 달인 50년 5월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기 위해 비밀리에 중국을 방문한다. 전쟁 계획을 모르고 있던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전쟁에 동의한 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전문을 띄웠다. 스탈린은 국제정세가 변했기 때문에 전쟁을 허락했다고 했다.

이에 마오쩌둥도 김일성의 전쟁 계획에 동의한다고 했다.

[인터뷰] "(마오쩌둥이) 직접적으로 스탈린을 반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한 김일성은 소련의 지지 하에 이미 충분한 준비를 했으니 중국이 개입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당시 중국은 여전히 자신의 남쪽 통일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직접 한국 전쟁을 지원하러 갈 필요는 없었지요. 이러한 의미에서, 마오쩌둥은 1950년 5월에 김일성에게 동의의 뜻을 나타냈습니다."


김일성이 제안하고 스탈린이 허가하고 마오쩌둥이 동의한 전쟁. 

전쟁은 이제 카운트다운만 남겨놓고 있었다.

북한은 남북 총선거를 제의하는 등 평화 공세를 취하면서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49년 겨울부터 50년 봄까지 북한군은 각 사단별로 대규모 기동훈련을 실시했다.
북한에 남아 있던 소련의 군사 고문단은 전쟁경험이 풍부한 작전 고문단으로 전면 교체됐다.

[인터뷰] "49년도 말까지는 고문들도 훈련고문들이었어요. 인민군대를 훈련하는 훈련고문들이 왔다가 6.25가 터지기 4개월 전에 훈련고문들을 싹 보내고 작전고문이 왔어요. 이때까지는 교육 관계의 고문이지만 이 사람들을 보내고 1월부터는 전쟁을 지도하는 고문들 그 고문들이 아마 한 4-50명 왔지요."

인민군이 속속 38선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전쟁이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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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20111029: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

원고 2011.10.27 14:27 Posted by 오미크론2

  흑묘백묘(黑猫白猫)란 말이 있습니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주도한 덩샤오핑의 주장으로 유명해진 말이지요.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고양이의 빛깔과 상관없이 쥐만 잘 잡으면 되듯이,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중국 인민을 잘 살게 하면 그게 제일이라는 의미로서 1980년대 중국식 시장경제를 대표하는 용어입니다. 실제로 덩샤오핑의 이러한 개혁·개방정책은 중국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끌어냈고 지금의 중국은 미국에 이에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입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남쪽으로 오르든 북쪽으로 오르든 산 꼭대기에만 오르면 그만이듯, 검은 고양이냐 흰 고양이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고양이의 역할이 쥐를 잡는 것이라면 가장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장땡이겠지요. 그 고양이의 비쥬얼이 깔끔한지 추레한지, 재산이 얼마인지 빚이 얼마인지는 부수적인 요소입니다. 윤리 선생님을 뽑는 것도 아니고 전쟁에 투입할 야전 사령관을 선출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비유컨대 고양이에 대한 평가는 그 고양이의 정책과 비전, 행정능력에 근거해야 할 것입니다. 배우자 고양이가 어떤지 부모 고양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따위는 아무리 고양이의 가치관 판단을 위한 참고용이라 해도 여성월간지 가십거리 기사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우리가 이러한 소위 ‘판단’을 하는 것도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기독인들이 세속의 제도에 따라 위임받은 역할 때문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바, 이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단순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중략)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중략)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롬 13:1-7)”
  요컨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니 통치하는 권세에 순종하라는 것, 벌 받는 것 때문이 아니라 양심 때문에라도 순종하라는 것, 두려워하고 존경하라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활동했던 초대교회의 시대 여건 즉 당시 로마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고려한 조심스러운 언급이라는 해석을 내놓을지 모르지만 그건 아닌 거 같습니다. 시대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면 그게 어디 말씀인가요.
  세상 권세에 대해 예수님이 내놓은 답은 꽤 쿨합니다. 책잡을 구실을 캐내려 예수님을 세속적 이해관계 속으로 끌어들이려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옳다고 하든 그르다고 하든 이슈가 될 수 밖에 없는 교묘한 덫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는 종교관의 한계를 드러내는 질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편승하거나 반목하거나 둘 중의 하나로 수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주어진 객관식 보기를 택하지 않고 예수님은 전혀 다른 답을 내놓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세속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뒤섞지 말라는 대답 앞에 머쓱해진 바리새인들의 벙찐 표정이 떠오릅니다.
  하늘을 바라보되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신앙인으로서 잠시간 가이사의 몫에 관심을 기울였다면 이젠 하나님의 몫을 위해 다시 전념해야 하겠습니다. 바빠서 그랬든 지쳐서 그랬던 우리가 잠시 한눈을 파는 그 순간에도 말씀은 끊임없이 뭔가 역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매 주의 예배가 그렇고 크고 작은 모임, 행사들이 그렇지요. 당장 내일은 평강의 가게가 열립니다. 좋은 물건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들어와야 할 텐데, 비가 온다거나 너무 춥다거나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준비하고 진행하고 뒷정리하는 요셉들이 많아야 할 텐데, 수익금의 규모와 무관하게 모두가 즐기고 감사하는 자리가 되어야 할 텐데 등등 걱정이 많습니다. 어느 것 하나 소수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믿고 맡기는 거죠. 가이사의 일이든 하나님의 일이든 믿고 맡긴 후 그 결과에 순복하고 감사하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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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20110619: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원고 2011.06.17 04:59 Posted by 오미크론2
 

  큰 아이의 주일학교 선생님은 매주 성경읽기 체크를 한다. 다섯 살배기 아이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어올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부모들이 옆에서 읽어주라 권하는 것이다. 성경이 재미있어서 라기 보다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가 또 듣고 싶은 마음에 아들 녀석은 잠자리에 들 무렵 성경을 읽어달라고 조른다. 그 참에 나도 잠시나마 경건모드로 전환한다.

  시편, 잠언은 읽기에 편하고 이해도 잘된다. 하지만 듣기 좋은 말도 삼세번이라고, 장이 넘어갈수록 잔소리 비슷하게 들리는 게 집중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역사서였다. 아들 또래가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울 듯 하지만 역사서는 그 오밀조밀한 스토리 자체가 큰 매력이다. 열왕기서 초반에 기록된 다윗 왕의 유언은 다시 봐도 뒤끝작렬 포스가 넘친다.

  사사시대에서 왕정으로 넘어가는 장면을 묘사한 사무엘서부터 읽어주기 시작했는데 몇 장 넘어가지 않아 중간중간 멈칫하게 된다. 사람을 죽이고 목을 벤다는 둥 손발을 절단하여 매단다는 둥 배를 찌르니 창자가 땅에 흐른다는 둥, 전쟁과 전투는 왜 그리 많고 그 묘사가 어쩌면 그렇게 디테일한 지 이걸 그대로 읽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여지는 것이다. ‘19금'까지는 아니어도 ‘12금’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게 아닐지.

  아무리 표현을 절제해도 전쟁의 묘사는 단지 몇 단어만으로도 참혹함을 드러낸다. 전쟁은 그런 것이다. 절망감과 공포가 대중을 지배한다. 거기 인간성은 없으며 그 현장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은 모습을 감춘다. 시체라 부르기도 힘든 고깃덩이가 널브러지고 연약한 육신은 유린당한다. 죽지 않기 위해 죽여야 하는 야만이 이성을 침묵시킨다. 백만 명의 사상자와 천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든 한국전쟁도 마찬가지이다. 3년 동안 전국토가 한번 이상씩 전선이 되었던 그 때에 군인과 민간인의 운명은 서로 다르지 않았다.

  휴전협정 후 58년이 지났다. 철없는 꼬맹이일 때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어느덧 일흔을 바라보고 있다. 그 처참한 순간순간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할지 몰라도 기억은 생각보다 세월에 약하다. 고스란히 원래의 모습을 지키기엔 지나간 60여년의 격변이 너무 거칠다. 흩어지고 색바랜 기억의 조각들은 커다란 이미지로 모여들고 그 이미지에 의해 기억의 세부 내용들이 재정의되고 단순화된다. 하물며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들이 학습해온 ‘한국전쟁'의 의미는 더더욱 명료하다. 광기로 무장한 북한 괴뢰군이 선량한 대한민국을 침탈하려는 시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전쟁은, 그리고 전쟁을 통해 서로 맞부딪친 세력은 선 혹은 악으로 무 잘라내듯 심플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태평양 전쟁의 종식, 일본군 무장 해제를 위한 한반도 분할 점령,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에 대한 지지의 차이로 표면화된 좌우익 간 대립, 남과 북 각자의 정부 수립, 미국 소련의 군대 철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그리고 서로 다른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벌어진 38선 부근의 크고 작은 전투, 냉전, 애치슨 선언, 북한의 치밀한 계획, 소련의 허가, 중국의 동의, … 이 모든 것들이 씨줄과 날줄로 얽혀 전쟁으로 이어졌다. 배경이 복잡한 만큼 한국전쟁에 휘말린 당시 사람들의 심정 또한 단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희생의 순수성이 어떠했든 간에 선열들의 아픔과 눈물 위에 우리가 있다는 것이고 우리는 늘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워레인저에 열광할 또래들에게 국방색 옷을 입히고 태극기를 흔들게 하는 것만이 나라사랑의 길은 아닐 것이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했다 말씀하시지만 그런 전쟁조차 일어나지 않기를 소원한다. 두 번 다시 이 땅 위에 60여 년 전과 같은 비극이 발생하지 않기를, 우리가 싸울 전쟁은 오직 신령한 전쟁만이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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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r. 후아유 (Death At A Funeral, 2007) 중에서

원고 2011.02.21 01:54 Posted by 오미크론2
아버지는 특별한 분이셨어요
완벽하시진 않았을지 모르지만
좋은 분이셨어요
우릴 사랑하셨구요
제가 오늘 하려고 했던 것은
품위있게 보내드리려는 것 뿐이었어요
그게 과욕인가요?
그리고
아마도
하고 싶으신 일도 있었겠지요
인생은 단순하지 않아요 아주 복잡하죠
우리 모두 던져졌을 뿐이에요
무질서와 혼돈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요
의문 투성이지만 답은 없는 세상이죠
항상 죽음이 곁에 따라다니는 ...
최선을 다할 뿐이지만  
항상 최선을 다할 순 없죠
아버진 최선을 다하셨어요
항상 제게 말씀하셨어요
"네 인생에서 하고픈 일을 해라
얼마나 이 세상에 있게될지 모르니까
또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중요한 것은 도전했다는 사실이다"
부모는 항상 바른 길로 인도하죠
하지만 결국엔
혼자 해내야만 합니다
스스로 성숙해야만 되죠
여러분이 이곳을 떠나실 땐
제 아버지의 참모습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반듯하고 사랑스러운 분으로
너그러운 마음으로 봐주실 수 있으시면
또 아버지를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이 세상이 훨씬 좋아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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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출석카드

원고 2011.02.11 00:24 Posted by 오미크론2

  새해부터 기독사관학교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남 못지않게 신앙생활을 꾸려나가는 여타 요셉들에게는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겠지만 나름 동기가 절실했다. 메말라가다 못해 침잠의 끝까지 가라앉은 영성을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며 집사람이 내놓은 방안이었으니까. 언젠가부터 아이들 모시고(?) 주일 2부 예배드리는 것조차 힘겨워진 나한텐 이마저도 마뜩찮은 제안이었지만 그 딴 식으로 계속 살 거냐 라는 마음 한구석의 호령에 움찔하고 그러기로 했다.

  주일 2부예배후 타임과 주일 오후 4시 반 타임. 나와 집사람이 한 타임씩 나누어 듣되 한 사람이 수강할 때 다른 사람이 아이들을 맡는 조건이다. 한식과 기호식 달랑 두 가지만 나오는 회사 점심 메뉴조차도 고르기가 귀찮아 앞사람 따라가는 나로서는 두 타임 중 하나를 고르는 것에도 생각이 많았다. 당신이 좌하면 내가 우하고 당신이 우하면 내가 좌하겠다며 어줍잖게 아브라함 흉내를 내다가 결국 난 주일 2부예배후를 택했다. 요셉선교회에서 토요일 오후 4시에 기독사관학교가 운영된다는 걸 모르지 않지만 토요일에도 곧잘 출근이 요구되는 상황을 감안하면 그나마 최선의 선택이다.


  모리아와 사무엘의 주일 2부예배 끝 시각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몰라서 처음 몇 주 동안은 애를 좀 먹었는데 이내 익숙해지고 나니 모리아를 가득 매운 그 인파 속에서도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저 형이 왜…' 나야 그렇다 치지만 이 시각에 여기보다 토요일에 요셉에서 사관학교를 수강할 법한 선배다. '참, 72또래지…' 사무엘 성전의 성가대석을 지키고 있는 여러 72또래들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짠해왔던 참이다. 실제로 몇 주 안 남기도 했지만 파송은 이미 그렇게 진행되고 있었던 모양이다.


  기독사관학교를 수강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이 출석카드이다. 교통카드 비슷하게 생긴 것인데 뒷면에 내 이름이랑 학번, 전화번호 등이 찍혀 있다. 강의가 끝난 후 모리아를 나설 때 판독기에 갖다 대면 삐익 소리와 함께 판독기 램프가 빨강에서 녹색으로 바뀌면서 그 너머 노트북에 내 이름이 나타난다. 그것으로 사관학교 수강 여부가 기록되는 것이다. 모리아 1층을 가득 메운 인파가 각 출입구에 설치된 판독기 앞에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라면 장관이다. 강의 장소로는 그다지 좋은 여건이 아니기에 다음 주부터는 모리아 말고 다른 성전에서 모인다지만 이 출석카드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된다고 한다.

  격세지감이다. 14년 전엔가 솔로몬 성전(지금의 여호수아 성전 자리)에서 성경사관학교 강의를 들을 때에는 성전 문 앞을 지키고 서 계신 담당 전도사님에게 출석 카드를 내밀고 해당 날짜에 도장을 받는 방식이었다. 칸칸이 수놓아진 도장을 보며 내가 이만큼 꾸준히 자리를 지켰구나, 이때는 왜 빠졌지 라며 지난 시간을 복기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 직업상 매일 스마트폰 소프트웨어와 씨름하는 와중에도 느껴보지 못했던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간극을 이렇게 체감하다니 새삼스러운 일이다.


  출석카드를 들고 판독기 앞에 줄을 서 있자니 문득 재밌는 생각이 떠오른다. 이 카드가 매주 찍는 출석 카드가 아니라 생의 마지막을 저울질하는 관문을 통과하는 카드라면? 그리고 내 카드를 갖다 댔는데도 판독기 불빛이 바뀌지 않고 "등록이 안 된 카드입니다"라며 싸늘한 안내원 음성이 흘러나온다면? 그 너머 노트북에 내 이름 석 자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노트북 앞에 앉은 주재자가 '누구냐, 넌?'이라는 시선으로 날 쳐다본다면?

  스치듯 떠오른 생각에 마음이 착잡해진다. 날씨도 많이 풀렸는데 공연히 옷깃을 여며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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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정기검진

원고 2010.11.12 03:37 Posted by 오미크론2

  "… 평균치보다 혈압이 쪼오금 높으시네요? 많이 높은 건 아니니깐 걱정할 정도는 아닌데요, 다만! 짠 음식, 기름진 음식 좀 피해주시면 되요. 간 기능은 정상인데… 아하! 지방간! 작년보다 좀 더 진행이 된 걸로 나왔어요. 이건 좀 주의하셔야 되요. 음식물 먹은 게 다 소비되지 않고 쌓이는 데 이게 간에 지금 붙어있는 거라 보시면 되거든요. 요거 나중에 간수치가 안 좋아지면 간경화로 갈수도 있고요, 비만까지 겹치면 당뇨, 고혈압, … 아~주 골치 아파질 수 있어요. 뭐, 별거 없어요. 음식물 줄이고 운동 많이 하고. 아시죠? 유산소운동. 가벼운 조깅, 속보, 수영, 등산, 자전거 타기! 줄넘기! 요런 거 꾸준히 해주시면 되요. 숨 야악간 찰 정도로 매일 30분씩. 알겠죠? 육류, 튀김요리, 내장요리, 새우! 오징어! 이런 거 피하시고 잡곡, 야채, 해조류 뭐 이런 거 주로 드시고. 물이랑 채소 빼곤 다~ 남는 영양소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시고,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는 거예요. 위염이 약간 있네요? 이거 작년에도 나왔던 건데…"

  다소 묵직한 톤의 남자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쉴새없이 쏟아진다. 운동 종류, 음식 종류 나열할 때는 리드미컬하게 박자까지 타는 거 같다. 이해는 간다. 건강검진 결과라는 게 천차만별일 리는 없고, 대충 비슷한 나이 또래면 비슷한 결과가 나올 테니, 앉아서 하루 종일 한 얘기 또 하고 한 얘기 또 하다보면 자연히 쫑알대는 것처럼 들릴 게다. 그렇지만 건강검진센터 상담 직원의 수다에 신경이 집중되고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건강에 대한 조언이니까.


  쪼그려 앉았다가 벌떡 일어나면 잠시동안 주변이 별천지처럼 반짝거린다. 눈 한쪽은 시력이 예전같지 않은 게 초점이 흐릿하다. 어깨랑 뒷목은 뻐근함을 달고 살고, 퇴근 길 막차 놓칠세라 계단 좀 뛰어오르면 그새 숨이 차오르고 무릎이 찌릿거린다. 하지만 그 뿐이다. 나타나는 '증상'들은 있지만 '왜' 그런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누가 일러주지 않는 한 알 도리가 없다.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안다고? 글쎄, 그건 요단강 건널 채비하고 '오늘 아니면 내일'하고 계신 어르신들 얘기다. 엊그제 멀쩡히 성가대에서 봉사하고 오늘 급성간염으로 병원 신세지는 게 우리다. 그만큼 모른다.


  건강검진이란 게 그렇다. 살 좀 빼야지 운동 좀 해야지, 평소엔 그저 아쉬운 소망 정도에 그치던 것들이 당장 아주 구체적인 목표로 정리된다. 지금의 내 몸이 어떤 상태이고 이대로 쭈욱 간다면 어떤 상태를 맞게 되는지 또렷한 그림을 그려준다. 위험한 사태를 막기 위해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극단적인 표현은 세련되게 피하면서도 또박또박 할 일을 친절하게 안내해준다.

  생각해 보면, 스스로 잘 안다 자부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한(그렇다고 뭐 딱히 남이 더 잘 아는 것도 아니다) 것은 건강만이 아니다. 일 년에 한 번, 신앙의 정기 검진이 있다면 참 좋겠다. 내 신앙에 뭐가 부족한지 딱 꼬집어 주고 뭘 어떻게 하면 그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지 구체적인 방법까지 친절하게 안내해주는 그런 검진 말이다. 뭘 조심하고 뭘 피해야 하는지 조목조목 짚어주는 그런 안내 말이다.


  "… 평균치보다 찬양 지수가 쪼오금 떨어지네요? 많이 부족한 건 아니니깐 걱정할 정도는 아닌데요, 다만! 짜증내고 화내고 욱하고 뭐 이런 거 피해주시면서 짬짬이 흥얼흥얼 곡조 있는 기도, 아시죠? 구속사 이해 지수는 정상인데… 아하! 성경읽기! 작년 보다 좀더 떨어진 걸로 나왔어요. 이건 좀 주의하셔야 되요. 산수가 약한데 수학을 잘 할 수는 없잖아요? 요거 나중에 구속사 시리즈 계속 출간되면 아무리 읽어도 뭔 얘긴지 모르게 되면서 아~주 골치 아파질 수 있어요. 기도 지수 괜찮고, 어디 보자, 성도 간의 교제 지수도 그럭저럭 … 헌데! 아, 이게 친한 사람들 쪽에만 몰려 있네. 교회 새로 오신 분들도 부단히 챙겨주는 거, 이게 중요하거든요. 직장 쪽을 좀 볼까요? 음, "아무개 씨도 교회 다녀?"란 얘길 올해에만 열 번 이상 들으셨네요? 요거 좀 줄여주실 필요 있겠고요. 뭐, 별거 없어요. 교회에서 하던 것처럼 직장에서도 신실하려고 노력하고 성격 좀 죽이고! 겸손하고 화목하고! 동료들 온화하게 대하고! 뭐 그런 것들 꾸준히 해주시면 되거든요. 성도가 은혜를 끼쳐야죠, 주변에, 그죠? 그리고 보자… 헌금이나 십일조는 정확히 하셨네요. 그런데, 아하! 감사가 부족했어요. 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봉헌할 때 감사하는 마음은 챙겨주셔야 되죠. 봉사는, 어디 보자, 보름 전에 평강의 가게가 열렸는데 … 여기저기 빠릿빠릿하게 많이 일하셨어요. 요런 거 참 좋은데, 아! 초소 봉사는 좀 약하시네요, 그죠? 게다가 성전 청소, 주일 배식! 분리 수거! 평소에 봉사가 꾸준하게 이어지진 않았어요, 알고 계시죠? 이런 거 꾸준히 해주시는 게 공력에 차암 보탬이 되거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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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형이 선교원 발표회

Family 2010.08.09 17:47 Posted by 오미크론2
도형이 선교원 발표회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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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10 칼럼 원고

원고 2010.07.08 11:22 Posted by 오미크론2

제목: 어떻게 기르오며 어떻게 행하오리이까


  주일 2부 예배 시간, 사무엘 성전 뒤편은 아이들 박람회장입니다. 다양한 개월 수, 생김새와 성격도 제각각인 영유아들이 예배에 집중하려는 엄마 아빠의 긴장을 잠시도 늦출 새 없게 만듭니다. ‘경건한 예배를 위해, 보채는 얼라들은 성전 밖에서 다스려 주십사’는 안내 자막이 뜨면 유난히 크게 들리던 어느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제서야 잦아듭니다. 성전 밖은 숫제 아이들의 놀이터입니다. 삼삼오오 모여 딱지를 치고, 공을 던져 받고, 비눗방울을 불어댑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머리가 띵해질 만큼 무더운 한낮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을 겨를도 없이 해맑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슬며시 미소가 피어납니다.


  반면, 세상은 참 험합니다. 연일 매스컴에서도 보이듯이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력범죄는 끊이질 않습니다. 어느 다큐멘터리 자료에 따르면 2008년 한 해 동안 발생한 아동청소년 성폭력 범죄는 6,300여 건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이건 신고 건수요, 실제로는 더 많은 범죄가 있었겠지요. 우리가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오늘 하루 동안에도 이 땅의 어딘가에서 17명 이상의 아동들이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현실입니다. 그딴 놈들은 화학적 거세 따위의 자비로운 방법이 아니라 오장을 발라내고 사지를 토막 내어 서울광장 한복판에 효수해야 한다며 핏대를 세우시던 지하철의 어느 어르신 모습이 떠오릅니다.

  몇 주 전엔가, 예배 시간에 찡찡거리는 둘째를 재우려 성전 밖으로 나갔더랬습니다. 퀵보드를 타고 돌아다니는 안면 익은 아이들과 몇 마디 얘길 나누다가 “모르는 어떤 삼촌이, ‘아빠 친구인데 아빠가 너 데려오래’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라고 물어봤었지요. 문자 그대로 ‘뭘 어쩌란 말이냐’라는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을 상대로 일장 연설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성도를 눈동자처럼 지키신다는 말씀을 믿는 우리의 믿음이, 가끔은 혹 방임을 덮어두기 위한 자위는 아니었는지 반성해봅니다. 전적인 신뢰의 출발점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 아닐까요.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부모의 심경에 참 많은 변화를 가져다줍니다. 아내/남편과의 결속과는 또 다른 성격의 강한 결속이 생깁니다. 회사 게시판에 [펌글]이라는 머리글로 올라온 부모 자식 간 감동스토리라도 하나 읽고 나면 집에 있을 아이들 얼굴이 떠오르고 가슴 한가운데가 저릿하며 짠해오는 게 예전과는 참 다른 느낌입니다. 오죽하면 영화 '크로싱'을 보다가 급기야는 꺼이꺼이 울어버렸던 적도 있었네요. (가족의 약과 식량을 구하기 위해 북한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와, 그를 찾아 나선 어린 아들의 안타까운 엇갈림을 그린 영화입니다. 자식 때문에 속 썩을 때 보시면 즉효입니다)


  자녀를 통해 부모의 어두운 면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내 부모님의 이런 모습만은 내 자녀에게 보이지 않으리라 꼭꼭 다짐했던 그 무언가를 어느 순간 내가 내 자녀에게 보이고 있음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수십 년에 걸쳐 패인 나와 내 부모님 간의 감정의 골을, 내 자녀와 나 사이에서도 반복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됩니다. 그래서 자녀는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나 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녀는 부모를 닮아갑니다. 유전적인 요소도 분명히 있겠지만 가족이란 이름으로 함께 살면서 보고 듣는 데로 닮아가는 면이 더 클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따라하며 닮아가기까지 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부담이 아닙니다.

  죽지 않고 승천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의 아들 므두셀라가 태어난 시점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설교말씀처럼 마누라에 자식새끼 키우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좀 어려웠겠냐며 에녹의 독한 신앙을 되새길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에녹은 ‘자녀’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깨달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좀 과장하면 에녹은 자녀가 태어난 바로 그 때부터 개과천선한 셈입니다. 그런 뜻에서 ‘자식은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이라는 표현은 꽤나 적절합니다. 신앙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는 로또 같은 존재니까요.


  공부에도 왕도가 없듯이 육아에도 정석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삼손이 태어나리라는 예언을 들은 그의 아비 마노아는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오리이까(삿13:12)”라고 물었다죠. 우리도 이 질문을 가슴에 품고 자녀와 부모가 함께 성장하는 길을 찾아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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