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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2013.09.24 15:51 Posted by 오미크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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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진납세

원고 2013.08.03 05:21 Posted by 오미크론2

제목: 자진납세

해방 이후 근대화, 민주화가 너무 빨리 진행된 부작용이겠지만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는 퇴임 이후의 삶이 순탄치 않았던 사람이 여럿 된다. 실정(失政)의 책임을 지고 망명길에 오르거나, 내란 수괴 등의 죄목으로 퇴임 후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등의 불명예는 그나마 약과다. 재임 중 측근의 흉탄으로 비명에 가거나, 퇴임 이듬해에 가택 부근에서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거둔 경우까지 있다.


최근에 부쩍 매스컴에 등장하는 어느 전(前) 대통령도 이들 중 한 사람이다. 재임 기간 중 뇌물을 받아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약 2200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으나 16년이 지난 현재까지 1600억 원 이상이 미납된 상태라고 한다. 추징을 안한 것인지 못한 것인지 그 복잡한 정치적 속내까지는 알 수 없지만 시효가 거의 끝나갈 때마다 일부 재산을 압류하여 강제 처분하는 방식으로 추징 시효를 근근이 연장시켜왔던 차에 지난 6월, ‘공무원 범죄 몰수 특례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일명 ‘전OO 추징법’이라 불리는 이 개정안을 통해 추징 시효는 현행 3년에서 10년으로 연장되었고 추징 대상도 본인뿐만 아니라 제3자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이로 인해 검찰의 추징금 환수 작업은 가속이 붙었고 연희동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은 물론 자녀들이 소유한 회사와 자택에까지 압수수색이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발견된 고가 미술품 등의 재산은 압류되었고 조세피난처에 설립된 페이퍼컴퍼니를 통한 자금 흐름, 친인척 명의의 부동산 등도 조사 대상에 올랐다. 드러난 것이 이 정도이니 모르긴 몰라도 주변인 수십 명에게까지 확대된 자금 추적은 정치적으로 볼 때 시쳇말로 영혼까지 탈탈 털리는 상황이라 하겠다.


불법으로 얻은 자금을 국고로 반납할 의무가 생겼고 이러한 선고 내용을 집행하는 것이라 한층 더 심해진 셈이지만 채무란 것은 이렇듯 원칙적으로 혹독하다. 오죽하면 ‘빚쟁이는 발을 뻗고 잠을 못 잔다’는 속담이 있겠으며 성경은 ‘빚진 자는 종(잠 22:7)’이라고까지 하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로마서의 기록은 그 강도 면에서 갑(甲)이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14)” … 은혜를 받았으니 보답해야 한다는 식의 얌전한 표현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절박함이 묻어난다. 역시 사도 바울이다.


수련회가 끝났다. 예배의 은혜가 예배자의 마음가짐에 (어느 정도는) 달려 있듯이 이번 수련회를 통해 받은 은혜의 분량도 서로 같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 은혜의 절댓값을 강요받을 필요는 없지만 우리 안의 양심이 옆구리 쿡쿡 찌르고 있음은 인정해야 하겠다. 우리에게, 갚아야 할, 은혜의 채무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게다가 평강제일교회 말씀 사역의 분기점을 이룬 구속사 시리즈가 발간되기 시작한 지 벌써 햇수로 7년째에 접어들었음은 새삼 긴장되는 대목이다. 나의 구속사도 7년째가 맞는가? 정말로?


가진 재능이 내세울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어릴 적부터 이 교회에서 받아 온 은혜가 곧 빚이라 어떤 식으로든 일할 수밖에 없다며 씩 웃던 요셉 어느 선배의 말이 떠오른다. 비유컨대 누구처럼 ‘내 전재산은 29만 원’이라고 강변하는 요셉도 있을 수 있다, 처지가 다르고 형편이 다르니까 말이다. 마음은 있으나 그 여건에 들어맞는 사역의 장이 없다면 찾아보자. 찾아도 안 보인다면 조장이나 주위 임원들에게 요청하자, 내 상황이 이러저러한데 내가 일할 수 있는 자리가 있겠느냐고. 그런 자리를 찾고 만들어내는 것은 직분자들의 몫이다. 마침, 총회도 3주 앞으로 다가왔다. 임명장을 새로 나눠주는 것이 총회의 전부가 아닐진대 헌신의 자세를 일신(一新)하는 것도 총회를 맞이하는 요셉에게 요구되는 마음가짐이다. 핵심은 채무 변제를 향한 스스로의 의지이다.


자산으로 간주되는 세상의 채무(부채)와 달리, 은혜의 채무는 빨리 갚는 것이 상책이다. 받은 은혜에 상응하는 납세의 의무를 다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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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2013.05.24 14:08 Posted by 오미크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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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2013.03.08 11:26 Posted by 오미크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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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2013.02.21 15:50 Posted by 오미크론2

참고용 web editor 사이트

 

TinyMCS Demo

http://www.tinymce.com/tryit/full.php

 

SmartEditor Demo

http://jindo.dev.naver.com/smarteditor/demo/SmartEditor2.html

 

OpenEditor Demo

http://uie.daum.net/openeditor/sample/1.5.1/editor.html

 

FCKEditor Demo

http://drupal.fckeditor.net/demo

 

SPAC Web Editor

http://demo.webeditor.kr

 

CHEditor Demo

http://www.chcode.com/cheditor/demo.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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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2013.01.17 20:16 Posted by 오미크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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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aol.com/?mobile=false
http://worldpress.org/
http://www.qq.com/
http://www.naver.com/?mobile
http://www.daum.net/?nil_top=mobile
http://www.nate.com/?f=mnate
http://www.cyworld.com/pims/mhsection/mh_index.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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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 2012.09.12 23:29 Posted by 오미크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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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분단(하)

한국전쟁 2012.07.20 23:17 Posted by 오미크론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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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분단(상)"으로부터 이어집니다.

45년 10월, 조선해방 축하집회에 운집한 7만여명의 평양시민들 앞에 모습을 들어낸 김일성.
한국 내에 정치 기반이 약했던 김일성은 소련군정의 도움으로 세력을 키워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련군정도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조만식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인터뷰]
"처음에 만나서 그 사람(조만식)이 이야기하기를 소련군과 협력할 용의가 없는가. 없다고 했습니다. 세 번 만났는데 세 번 다 거절했습니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들과 협력할 필요가 없다."

이후 조만식은 북한 정치무대에서 사라진다.

46년 2월, 김일성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선출되 행정부를 장악했다. 같은 해 11월, 이북전역에서 인민위원회 선거가 실시되 이 선거를 통해 기존의 임시 인민위원회가 정식 통치 기구로 정비됐고, 김일성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인민위원회의 첫번째 과제는 친일청산이었다.

[인터뷰]
"인민위원회가 생기면서 제일 첫 째로는 친일분자를 숙청해라 친일분자, 친일요소를 깨끗이 씻어버려라 그 때문에 친일이라고 몰리면 북한에서는 죽었어요. 그 때 그 당시 남한에서는 친일분자가 상당히 아주 그, 날뛰던 때거든." 

인민위원회는 사실상 정부의 기능을 수행했다. 급격한 사회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개혁의 골자는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아래 시행된 토지개혁이다. 지주소유지의 85%를 몰수하는 혁명적인 조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 20여일만에 신속하게 완료했다.

토지 개혁 이후 주요 기간산업을 국유화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토지 개혁이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라면 주요 기간산업의 국유화는 체제 유지를 위한 동력과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통치기구 정비와 함께 개혁작업을 완료한 북한은 경제적으로 안정돼갔다.

해방 1년 만에 북한은 남한과는 전혀 다른 사회가 되어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남과 북이 얼마나 다른 것을 선택했는지, 그리고 서로 다른 체제의 선택이 어떤 갈등을 낳게 될런지도 알지 못했다.

[인터뷰]
"성분이 사회 구성의 원칙으로 되어 있어서 소위 말하는 인테리 층이 제대로 채용될 그런 기회가 없는 이런 국가라는 걸 알았을 때 정말 있을 수 없다는 걸 제가 느낀 거죠."

지주, 상인, 종교인, 관리, 경찰 등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급격한 사회개혁으로 생활의 기반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이 남으로 내려왔다. 소련과 북한 인민위원회는 이들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38선 이남 지역은 해외에서 돌아온 동포들과 월남민들로 200만의 인구가 늘어났다. 생필품은 턱없이 부족하고 물가는 치솟았으며, 갈 곳 없는 실업자만 늘어났다.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정치적 혼란이 계속됐다.

45년 12월에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은 이 혼란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남북 각 지역의 정치세력과 협의를 거쳐 통일된 임시민주정부를 수립한 후 미, 소, 영, 중 4개국에 의한 후견을 한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
언론 보도에 의해 국내에 알려진 모스크바 결정은 신탁통치라는 부분만 강조된 것이었다. 38선 이남지역은 순식간에 반탁운동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인터뷰]
"그때 내가 경상도에 출장 갔다 와서 공산당 본부 가니까 주요 간부들은 다 없었어요. 중간 간부들이 앉아서 다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여운형씨를 찾아갔어요. 찾아 가니까 여운형씨도 (신탁통치) 지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때 박헌영은 평양 가 있었어요. 돌아와서 신탁통치는 지지해야 한다고 그래서 남로당이 신탁통치를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반탁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 지지로 좌익 세력이 입장을 바꾸면서 국론은 극명하게 분열됐고 좌우 대립이 격화됐다. 36년간 식민지배를 받고 이제 막 해방을 맞은 사람들에게 신탁통치란 너무나 민감한 문제였다.

온나라 전체가 탁치문제로 모이거나 갈라져 싸웠고 일상의 삶이 중지된 것처럼 연일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이어졌다. 신탁통치를 둘러싼 좌, 우익간의 갈등은 남한의 모든 사회 구석까지 파급됐다. 정치계는 물론 직장과, 학교, 지식인, 문화계까지 좌우익의 반목은 첨예하게 나타났다. 특히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반탁은 제2의 독립운동이었다.

[인터뷰]
"그건 도저히 불가능한 겁니다. 독립운동자로서는, 임시정부로서는 아무리 당장 죽더라도 그건 용인 못하는 일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그걸 독립운동과 마찬가지로 생각했습니다. 임시정부에서 포고령도 내렸어요, 그때. 미군정이 당황했죠. 신익희 선생 같은 분들은 체포될 각오를 하고선 (반탁운동을) 했어요. 미군정이 체포한다는 말도 있었습니다, 하도 반대를 하니까. 당시 반탁운동은 삼일운동하고 비슷하게 거국적으로 했어요."

신탁통치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무시한 것이며 또 다른 예속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김구의 생각이었다.

점차 증폭된 좌우익의 감정적인 대립은 급기야 폭력사태로까지 이어졌다. 47년 3월 1일, 각기 다른 장소에서 3.1절 기념행사를 치른 좌익과 우익의 시위대가 남대문에서 마주쳤다. 순식간에 아수장이 되어 유혈사태에까지 이르렀다.

낯선 풍경이었다. 서로에 대한 이와 같은 격렬한 증오감은 38선으로 분단되기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미군정은 한국인의 이런 격렬한 상태가 무엇에 기인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미군정 기간 동안 일제에 협력한 친일관리와 경찰들이 대거 복귀했다. 이에 대한 불만도 점차 높아갔다. 점차 사람들의 얼굴에서 해방의 기쁨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혼란한 정치 상황에 겹쳐 어려운 경제상황에 대한 불만은 점점 증폭되 갔다. 46년 9월, 노동자 총파업이 발생했고 대구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미군정이 실시한 양곡수집제도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된 대구 시위는 삽시간에 경북 지역 일대로 확산됐다.
9, 10월의 총파업은 복잡한 성격을 보이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남로당과 미군정의 싸움이었다.

[인터뷰]
"남로당을 조직하려고 하는데 미국이 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네스트 총파업을시작하게 된 겁니다.  미국같이 세계적인 민주국가가 우리가 정치적으로 일을 하려고 하는데 왜 허가를 안해주냐 제네스트 총파업 하면 미국이 세계적으로 큰 창피를 당할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은 불법화되고 체포령이 내려진 박헌영은 월북한다. 당시 38선 이남 지역의 좌익세력은 남로당으로 결집되 있었다. 미군정은 이들의 활동을 허용하지 않았고 지하로 숨어든 수많은 좌익들이 경찰에 검거됐다. 이 혼란이 가라앉았을 때 좌익은 큰 타격을 입었다.

혼란의 시기를 지내는 동안 38선의 분위기도 달라졌다. 불분명했던 선은 점점 더 분명해졌고 더 엄격하게 지켜졌다. 38선은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길 위로도 지나고 길도 없는 들판을 가로지르기도 했다. 대체로 아무 일도 없고 아무 위협도 없는 곳이 많았지만 그렇다고 그 선이 허술하게 방치되는 일은 없었다. 도로 차단기 하나 세운 것 뿐이지만 소련군과 미군에게 38선은 국경이었다.

[인터뷰]
"제가 남한에 갔던 것은 2-3명과 함께였습니다. 미국 장교와 만나기 위해 일부러 간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미국 장교들이 북한을 방문했는데 그들이 거기서 약 20km  떨어져 있는 곳에 주둔해 있다고는 했지만 우리가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건너갈 권리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명령을 준수하고 따랐습니다. 남북한의 국경인 38선을 엄격하게 지켰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소련군은 38선까지만 갔고 장교나 군인들은 그 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38선 부근 남쪽 지역은 미군이 주둔할 것이라고 합의된 사항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이 땅에서 나고 자라 수없이 아래위, 남과 북을 넘나들며 살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엄포에도 불구하고 그 선을 넘나들었다.

[인터뷰]
"나는 그 때 장사하느라고 살기 어려우니까 원산에서 나는 오징어가 스무 마리 한 축이 싸요 한 열 축을 내가 짊어져 배낭에다 지고 남한에는 고무신이 열 켤레예요 그걸 팔면. 고무신 열 켤레 가져가면 고무신 한 켤레에 쌀 한 말씩이야 이북에서는요. 쌀 한 말이니까 장사가 배 장사가 되죠. 그렇게 했는데 잘못 걸리면 소련군한테 걸리면 다 뺏겨요"

한반도 38선 부근의 긴장만 고조됐던 것은 아니다. 2차대전 이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분명한 세력분할을 이루었다. 자본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간의 동서 냉전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자막]
처칠: "발트해에서부터 아드리아해에 이르기까지 유럽대륙을 나누는 ‘철의 장막'이 내려져 있다."

이 무렵 많은 동유럽국가들이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했다. 동유럽주민들의 서방 탈출이 잦아지자 이를 막기 위한 조치가 점차 가시화됐다. 그것이 이른 바 철의 장막. 동서 냉전의 상징이었다. 소련은 점점 팽창하면서 유럽을 위협했다. 자본주의 국가들은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해 고심했다.

1946년 그리스는 미국, 영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정부군과 공산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은 반군 간의 내전이 시작됐다. 동서 냉전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그리스 내전을 지켜본 미국은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한다.

[자막]
"오늘날 그리스 정부는 수천의 무장된 공산주의 군대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

트루먼 독트린은 미국 대통령 트루먼에 의해 발표된 미국의 외교정책으로서 공산주의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은 반공정부에 대해서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취하겠다는 선언이다.

[인터뷰]
"트루만 독트린은 일차적으로 소련이 다양한 공산주의 활동을 지원하고 그리스와 터키에 외압을 가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트루만 독트린이 말하는 바는 손 떼라는 것입니다. 손 떼라, 이들 정부를 끌어내리지 마라. 동유럽의 정부가 밀려나고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와 같은 작은 나라들 소위 발틱국가들이 예속화 되었습니다. 당시 트루만으로서는 어떤 독트린, 정책을 고시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공산주의는 전염병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곳에서 쉽게 번식한다며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감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공산주의를 막는 가장 좋은 방어책이라고 주장했다. 이같은 이론 아래 마샬플랜이 탄생했다.

마샬플랜은 유럽부흥계획이다. 2차대전 이후 황폐해진 유럽의 동맹국에 대한 원조와 재건을 약속해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경제가 발달한 곳에는 소련의 이데올로기가 자리잡을 수 없다고 믿었고, 이것은 미국의 냉전정책이기도 했다.

스탈린은 미국의 일련의 행보에 대해 즉각적으로 대응했다.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공산화시킨 것이다. 미국과 소련의 이러한 총성없는 전쟁은 냉전이라는 형태로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될 때까지 근 40년 간 지속됐다.

뜨거운 냉전의 구도 속에 극단으로 대립하던 두 세력이 같은 시기에 한반도에 들어와 38선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던 것. 시간이 흐를 수록 38선은 완전무장한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철저하게 지켜졌다. 서로에게 깊은 불신을 가진 소련과 미국이 총을 들이대고 있는 한 분단의 긴장을 제거할 방법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따라 서울과 평양에서 두 번에 걸친 미소 공동위원회가 열렸지만 미국과 소련은 모두 아무런 타협점을 찾지 못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를 거부한 반탁세력에게는 통일임시정부에 참여할 자격을 줄 수 없다는 소련의 입장과 모든 정치세력에게 참여 자격을 주어야 한다는 미국의 입장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열린 2차 미소 공동회의는 회담 결렬의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하기 위한 자리였을 뿐이다. 미국은 소련과의 회담이 더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반도 문제를 UN으로 이관한다. 소련은 대표단을 철수시켰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완전히 결렬됐다.

[음성]
"드디어 단기 4280년 11월에는 UN 총회에서 한국의 선거를 감시하기 위하야 UN한국위원단을 서울에 파견해왔다."

UN 한국임시위원단이 남한을 방문했다.

[음성]
"이날 도착한 위원단은 우리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찾게 하기 위하야 진심으로 노력할 것을 굳게 멩서하며 인사를 교환했다."

임시위원단은 북한과도 접촉했지만 북한은 이를 거절했다. UN총회는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가결했다. 남한의 단독선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UN 임시위원단은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음성]
"… 국민대회를 일으켰다. 우리는 또다시 국가 민족의 흥망을 좌우하는 위기에 당면하자 가능한 지역이라도 선거를 실시하자는 이승만 박사의 주장에 따라 …"

이승만은 이미 46년 정읍 발언[井邑發言]을 통해 남쪽만이라도 정부 혹은 위원회를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인터뷰]
"이승만 박사는 미국에 오래 계시고 그래서 국제 정세에 밝았다고요. 국제 정세에 비추어 볼 때. 국제 정세를 판단하는 통찰력이 빨랐다고. 아, 이거 안되겠다. 벌써 이북은 단독 정부를 세우고 있다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정읍 발언을 하면서 불가피하다 하는 것을 말씀을 하신 거예요."

단정 수립을 반대하던 김구와 김규식은 남북협상을 제의했다. 남한의 단독선거 움직임을 맹렬히 비난하던 북한은 남북연석회의를 제안해 왔다.

김구와 김규식의 제안에는 답이 없던 북한이 일방적으로 남북연석회의 소집을 발표하고,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남한 지도자들을 초청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회의에 참석했다.

[김구 연설]
"조국분열의 위기를 만구(挽救)하기 위하여 남북의 열렬한 애국자들이 일당에 회집하여 민주자주의 통일독립을 전취할 대계를 상토(商討)하게 된 것은 실로 우리 독립운동사의 위대한 발전이며, 이와 같은 성대한 회합에 본인이 참석하게 된 것은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인터뷰]
"우리가 통일이 안되면은 민주도 없고 자주도 없고 심지어는 동족상잔까지 되는 것이다. 벌써 그 때에 예견을 하고 발표했어요, 김구 선생이. 6.25 전쟁을 벌써 그 때 얘길 했습니다. 통일 안 하게 되면 결국은 둘이 갈라지면은 전쟁이 일어난다."

남북연석회의는 실질적 성과 없이 끝났다. 민족의 분단을 막기 위해 나섰던 김구와 김규식은 48년 5월 5일 깊은 실망을 안고 38선을 넘어왔다. 이제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불안 속에서 분단 국가의 수립은 곧 동족 상잔의 비극으로 이어지리라 예감했다. 이 모든 갈등과 분쟁의 시작이 된 건 부자연스럽게 생겨난 하나의 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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