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2.17] 40, 새로운 시작

원고 2009. 9. 14. 19:54 Posted by 오미크론2
(평강제일교회 요셉선교회 주보 제514호 2008. 2. 17)

  40은 참 특별한 숫자다.
  
  세상에 관영한 죄를 쓸어내기 위해 비가 쏟아졌던 기간도 40일이고, 모세가 자기 민족을 돌볼 생각을 갖기 시작한 것도 그의 나이 40세 때였다.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신앙의 연단을 받았던 기간은 40년이며, 십계명을 받기 위해 모세가 기도했던 기간과 공생애 시작 무렵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했던 기간도 각각 40일이다. 세상에서 나이 40을 불혹(不惑)이라 부르며 인생의 분수령으로 삼는 것도 우연은 아니리라.
  그리고 오늘, 파송예배를 통해 요셉선교회를 떠나는 선배들의 나이도 올해로 딱 마흔 줄을 헤아린다.  


  파송 혹은 졸업
  
  척박한 토양에 심겨진 요셉이라는 씨앗은 어느덧 '담을 넘는 가지'로 성장하였다. 오늘 파송을 맞은 여러 선배들의 기도와 땀, 눈물이 있었기 때문이라 해도 과찬은 아닐 것이다. 일단의 기관 활동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다음 기관으로 옮겨가는 단계에 이른 것은 축하받을 만한 경사다.

  짧게는 몇 년, 길게는 10년 이상을 몸담은 신앙의 터전이기에 성전 구석구석에까지 신앙의 이력이 아로새겨져 있을 법하다. 그 기억을 더듬을 때 감사와 아쉬움이 묻어나올 것 같다. 성전을 오가는 선배들의 시선에서 올해 들어 은근히 습기가 느껴졌던 것도 나름 이해가 간다.

  선배들의 파송을 바라보며 마음 한편이  짠하다. 좀 과장하자면 왠지 모를 위기의식 비슷한 것도 느껴진다. 저런 선배가 있어서 행복하다는 뿌듯함은 어느덧 이제 나도 저런 선배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바뀌어간다. 떠나는 선배 못지않게 어떤 후배들은 그 빈자리를 아쉬워하고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란 게 어찌 그리 간사하고, 시간은 어쩌면 그렇게 쏜살같은지. 헤어짐이 아쉽다며 붙잡은 손을 차마 놓지 못하는 것도 잠시일 뿐이다. 일상으로 돌아와 연속되는 분주함 속에 정신없이 지내다보면 어느새 또 1년이 지나고 우리는 다음 또래를 떠나보내는 시점을 맞게 될 것이다. 게다가, 어차피 평강제일 안에서 한 가족이 아닌가. 오늘 파송된 선배들을 다음 주 토요일에 여주기도원에서 만나게 될 지도 모르고, 구역예배를 통해서 혹은 대예배를 통해서 교회 이곳저곳에서 마주칠 게 뻔하다. 오늘의 파송이 학교나 직장에서의 이별과 사뭇 다른 의미를 갖는 이유다.
  "그때 그 선배, 정말 열심이었는데…. 요즘엔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해온 사람이라면 이따금 떠오르는 선배 한 두 명은 있을 것이다. 교회 일에 헌신하던 선배, 약한 후배들을 신앙적으로 보듬어주던 선배. 하지만 아쉽게도 어느 샌가 사라져 버린 선배, 지금은 어디 사는지조차 행방이 묘연한 그런 선배 말이다.


  오늘의 파송이 값진 이유 중 하나이다. 요셉에서의 몇 년간 자신의 신앙이 약해지지 않도록 지켜주셨음은 선배들의 감사 제목이다. 빡빡한 삶 속에서 온갖 시련과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열심으로 오늘까지 자리를 지켰음은 후배들이 우러러볼 대목이다. 내 나이 40에 이르렀을 때 과연 나는 저 자리에 설 수 있을까? 파송을 바라보는 우리 후배들의 화두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라는 경구가 떠오른다.‘이제 나의 요셉선교회 생활도 1년 남았다.’며 신앙생활에 열과 성의를 다하는 어느 70또래의 조용한 다짐은 믿음직한 귀감이다.

  나이 40을 가리키는 불혹(不惑)의 사전적 의미는 우리의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음”

  30대 청장년의 시기, 우리의 정신을 빼앗고 갈팡질팡하게 만드는 일이 어디 좀 많은가. 결혼을 통해 가정을 이뤄야 하고, 출산과 육아의 부담을 짊어지기 시작하며, 사회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닦아 놓아야 한다. 20대 때보다는 한층 안정되었지만 할 일은 더욱 많아지는 시기, 그래서 우선과 차선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짧은 소견에 근시안적인 판단을 내리기도 쉬운 시기이다. 파송을 맞은 선배들에게 우리가 존경의 박수를 보내는 것은 그들이 이 크고 작은 험난한 신앙 전투에서 자신의 믿음과 가정의 신앙을 굳게 지키고 영적으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마흔 줄에 들어섬과 함께 새로운 신앙의 도정을 떠나는 선배들의 신령한 무운(武運)을 감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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